2019/04/13 18:57

겨울 유럽여행 (38) 로마 : 트라야누스 시장 ├ 겨울 유럽여행 (2018)

1.

로마의 늦은 오후.

아침부터 빗속을 돌아다녀서 제법 피곤했는지, 숙소에서 끼니를 간단히 챙긴 뒤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부시시한 머리로 창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구름이 잔뜩 끼어 해가 보이진 않았지만, 밝기를 보아하니 슬슬 날이 저물 것 같았다. 곧 저녁식사 시간이다.

아까 먹고 잠들어서 그런지 그렇게 배가 고프질 않았다. 적당히 피자 한 조각 정도 먹고 싶은 걸. 주변에 있는 피자집엘 가봐야겠다.

나는 구글맵을 통해 몇 군데의 피자 가게를 찾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2.

비 내리는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는 제법 운치 있었다. 깊고 어둑한 하늘 아래 비에 젖어 윤기가 흐르는 유적, 그 유적을 덮고 있는 선명한 색의 풀과 덩쿨, 비에 씻겨지고 있는 듯한 로마 황제들의 동상과 난간에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 평소보다 훨씬 적은 관광객의 수까지...




단순히 피자 한 조각 먹으러 나온 거였는데 이렇게 분위기 있어도 되는 건가.

하긴, 이 맛에 숙소를 관광지 근처로 잡는 거지.

원래는 피자 가게에 가서 피자를 한 조각 산 뒤 바로 숙소로 들어가 뒹굴거릴 예정이었으나, 로마의 비 내리는 거리가 워낙 매력적으로 내게 걸음을 종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더 걸었다. 걷다보니 포리 임페리알리 끝자락(콜로세움 방향 반대쪽, 베네치아 광장 근처)에 있는 트라야누스 시장까지 갔다. 예전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재밌게 본 기억이 있는데.

한 번 들어가볼까. 빗속을 걸어서 몸이 좀 식었는데, 저긴 실내 관광지니까 왠지 따뜻할 것 같고... 나는 입구에서 5초 정도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입장료는 15유로였다. 생각보다 비싸다!

입장권은 트라야누스 시장과 그 한 켠에 만들어진 포리 임페리알리 박물관을 포함하고 있었다. 박물관 때문에 비싼 건가? 나는 시장만 보고 나와도 되는데.

매표소 앞에서도 5초 정도 망설이다가 구입했다.





3.

트라야누스 시장은 이름 그대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그럼 트라야누스 황제는 누구야?

트라야누스 황제는 로마의 오현제라 불리는 유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던 황제이다.

"로마 제국"하면 떠오르는 황제를 불러보라면, 아마 대부분 카이사르(엄밀하게 황제는 아니었으나), 네로, 아우구스투스 등을 말할 것이다. 이는 황제 개인의 화려한 인생 스토리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스토리는 극적이고 화려하며 재미있다. 구전되기 딱 좋을 인기있는 소재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딱히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 누구처럼 암살에 휘말리거나 정적과 암투를 벌인 일도 없었고 누구처럼 가족에게 시달리거나 대화재를 겪거나 리라를 켜며 시를 읊지도 않았다. 사생활도 소소했다. 남색이 좀 있었단 정도? 시대를 생각하면 평범한 축이다.

그래서인지 트라야누스는 업적에 비해 덜 알려져있는 편인 것 같다. 그의 업적은 놀랍다. 그는 속주 출신(스페인)이었으나 최초로 로마의 황제 자리까지 올랐다. 로마에겐 골칫덩이였던 다키아를 완전 정복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로마 시대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으로 부를 쌓았다. 쌓은 부로 공공시설 건설에 힘썼다. 포룸과 더불어 시장을 만들어 자유 거래를 장려했다. 제국의 번영과 공공의 이익에 힘썼다. 즉위 이전에도 이후에도 로마 시민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거의 완벽한 황제였다.




트라야누스 시장은 그런 그가 만든 시장이다. 사실 시장이라는 말이 조금 미안해지는게, 현재로 따지면 거의 복합 쇼핑몰 수준의 건축물이다. 기록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인 이곳은, 1900년 전에 건설된 것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유적의 보존 상태가 훌륭해 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참으로 기특한 장소인 것이다.

한가지 더. 게다가 이 쇼핑몰의 옥상에서 보는 뷰는 제법 훌륭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 아래, 트라야누스 시장의 옥상에서 바라본 로마 유적지의 야경이란...

어느새 나는 외출의 본디 목적이었던 피자를 잊고 시장을 헤매며 돌아다녔던 것이었다... 허허...

이 아래로는 그 사진들이다. 스크롤 쭈욱쭈욱.




다층 구조의 트라야누스 시장.




시장 아래로는 트라야누스 포룸의 일부가 보인다.

포룸은 무솔리니 때 저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대로를 뚫느라 많이 파괴됐다. 핵짜증난다. 포룸까지 있었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복합 상업/공공/레저 단지였을텐데.




베란다 쪽으로 나있는 창은 로마가 자랑하는 아치 구조.




각 점포마다 창과 문이 나있다.

창 쪽엔 제품들을 진열해놨을 것이고 문 쪽으로 손님들이 출입하여 이것저것 사갔겠지. 즐거운 상상중...

아 증말 저번 카라칼라의 목욕탕 때도 그렇고, 작은 규모로 유적 재현한 거 어디다가 좀 만들면 안되나. 트라야누스 시장의 1/5 정도의 규모로 작게 뭐 만들어서 거기서 관광품이나 먹을 거 팔라고! 복합 로마유적몰 이런거 있으면 내가 거기서 돈을 다 탕진하겠다 제발!




깜빡. 불이 들어왔다. 이쁘다아...




이쯤에서 돌려보는 파노1.




파노2.




위쪽은 상인들의 아파트였을까? 나중에 건설된 것 같은데 복원도에 저 부분이 있는 걸 보면 원래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음.




옥상 (발코니?) 바깥쪽에도 매대/점포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음. 월세는 얼마였을까.




그곳에서 바라보는 야경1. 이 때부터 피자를 까맣게 잊었다.




야경2.




야경3.




아랫쪽은 트라야누스 시장의 유적지 부분이고 (설치 미술 같은 걸 정원 군데군데 해놓기는 했다) 윗쪽도 시장이긴 하나 포리 임페리알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에 있던 두상. 코만 안깨졌으면 예뻤을텐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내부. 역시 트라야누스 시장의 일부다.

그야말로 쇼핑몰다운 구조다. 지금 당장 쇼핑몰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정말인지 쇼핑하고 싶다. 여기서 쇼핑하게 해줘. 트라야누스 황제가 세운 목적 그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엉엉.




박물관 내용 구성도 알찼던 것 같은데 신경써서 보질 않아서 기억 안남.

유적지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걸 보면 왠지 재미없다. 시장이었으니까 시장처럼 꾸몄으면 좋았을텐데.




잘 닦인 시장 발코니 쪽의 길. 이쯤되니 사람도 거의 없었다. 비 오는 날엔 관광객이 거의 없어 넘나 좋은 것.




이쪽으론 짐을 잔뜩 실은 수레가 왔다갔다 했겠지. 1900년 전의 모습이지만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뭘까.

우산을 손에 꼭 쥐고 한참을 그리 거닐었다...





4.

트라야누스 시장을 쭉 둘러본 뒤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정신은 로마의 어느 한 시대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멍했고, 몸은 쇼핑 센터에서 한참 쇼핑을 한 것처럼 피곤했다.




빗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빵빵거린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21세기로군. 그리고 나는 배가 고프다. 내 원래 목적은... 그래, 피자, 피자다. 얼른 아까 사기로 했던 피자를 사러 가야겠다.

골목길을 따라 나가려는 내 눈에, 젤라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피자를 먹기 전에 젤라또로 입맛을 돋구는 것도 나쁘진 않은 생각 같다. 그리고 로마에 왔는데, 1일 3젤라또는 못할 망정 1젤라또라도 해야하지 않겠어. 나는 원래 그곳에 가려고 한 것 마냥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젤라또 가게로 들어섰다.




젤라또 가게는 Il Cannolo Siciliano (Via Quattro Novembre, 95A, Roma, https://goo.gl/maps/HEWvVADbzqS2)라는 가게였다. 가게 입구에는 젤라또 페스티벌 유럽 챔피언이라는 문구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우와, 뭔가 챔피언의 가게인가 보다. 멋져.

이런 곳에선 추천을 받아 먹어야한다. 내가 골라봤자 티라미수 맛이나 초코 맛 따위나 먹을 거다. 특이한 것, 이 가게가 자랑하는 걸 먹고 싶다. 그래서 추천을 받았는데 티라미수 맛과 초코 맛을 추천해줬다. 이런.




추천받은 맛의 젤라또를 손에 들고 가게를 떴다. 젤라또는 챔피언다운 맛이었다.




젤라또를 쪽쪽 빨며 바로 근처의 피자가게로 들어갔다. Caesar Pizza (Via Magnanapoli, 4, 00187 Roma, https://goo.gl/maps/782z4XGKEer)라는 가게였다.

가게 아주머니는 젤라또를 쪽쪽 빨아먹는 나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고 나는 그에 부응해 더 귀엽게 젤라또를 먹었다. 냠냐냠. 냠냠. 가게 아주머니는 젤라또가 그렇게 맛있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자기네 피자도 맛있을 거라며 내 손에 피자가 담긴 봉투를 쥐어줬다. 기대가 되는군. 빠이빠이하고 나왔다.

나중에 숙소 와서 피자를 먹었는데 맛은 그냥 평범했다. 아쉬운대로 먹었다. 저런.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내일은 로마를 둘러보는 마지막 날인데 어떤 날씨려나. 비 오는 날도, 맑은 날도 상관없을 정도로 로마가 좋지만 역시 마지막 날은 맑았으면 좋겠다. 욕심일까. 어떠려나.




로마의 마지막 날 아침에서 계속!






덧글

  • 존평씨 2019/04/13 19:57 # 답글

    TMI 시작합니다.

    윗층은 당연히 있었겠죠.
    로마시민 대부분은 아파트에서 생활했다더군요.
    하지만 저 모습과는 좀 달랐을 거 같긴 해요.
    하중 문제로 아래는 석재,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를 많이 썼다더군요.
    종종 붕괴사고도 있었대요.
    1층은 상점, 2층은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층이 높아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서 가장 위층엔 거의 고시원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건물마다 관리인도 있었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배달시켜서 먹는 일이 흔했답니다.
    혹시 다음에 로마에 갔다가 시공간을 넘게 되면 닭을 튀기세요.
    enat님은 로마 최고의 거부가 될 겁니다.
  • enat 2019/04/14 20:30 #

    오~ 그렇다면 원래는 나무였던 부분을 나중에 돌로 보수한 걸수도 있겠네요~~
    그 시대 때도 서민들은 살기 힘들었군요... 고시원에서 사는데 붕괴 사고라도 일어나면 ㅠㅠ 어휴 대참사...

    그나저나 어떻게 아셨죠!? 닭 튀기는 건 아르바이트로 많이 해봐서 제 장기죠. 기다려라 로마... 180도 예열된 기름에 최고로 맛있게 튀겨주갔으... 로마에서 다량의 닭뼈와 함께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면 제 흔적이라 생각해주세요.
  • Tabipero 2019/04/13 21:26 # 답글

    갔다온지 꽤 되신 것 같은데 그래도 여행 갔던 걸 기억 하시네요...ㅠㅠ 제 여행기는 아직도 베네치아를 못 벗어났습니다. 뭔가 예전처럼 여행기를 열심히 쓰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 시장이...지도 찾아보니까 베네치아광장 근처에 있네요. 저런 곳을 몰랐다니 카라칼라 욕장?에 이어 못 가본게 아쉽습니다. 정말 로마시대 것이라고는 상상 못할만큼 현대적(?) 구조로 되어 있어 놀랍네요. 나중에 저런 유적에 심취한 중국 거부가 있으면 중국 어딘가에 저 모습을 복원(?)시킨 쇼핑몰이 나올지도요 ㅎㅎ
  • enat 2019/04/14 20:35 #

    그렇잖아도 기억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1) 우선 일기장을 펼쳐놓고 2) 어울리는 음악을 틀고 (보통 유튜브 asmr) 3) 사진과 일기장을 번갈아보며 그 때 생각을 미친듯이 합니다. 지금도 한참 전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지금 지나면 아예 기억조차 못한다! 힘내라 나 자신! 이런 느낌으로... ㅋㅋㅋㅋ
    그치만 예전처럼 열심히 쓰지 못하는 건 저도 공감합니다. 시간도 안나고 재밌게 써지지도 않고 -.- 요새는 여행 다녀와서 포스팅 하지말고 그냥 일기와 사진 앨범만 작성할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주... 중국 거부... 우와 설득력 있어요 그렇군요 중국 거부라면 분명 제 소원을 이뤄줄 거에요. 이탈리아는 죽어도 그런 복원(?)물을 짓지 않을테니 이탈리아 유적에 빠져든 중국 거부가 나오길 기도해야겠어요. 믿을 것은 중국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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