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4 19:39

겨울 유럽여행 (39) 바티칸 : 올라간다 쿠폴라 ├ 겨울 유럽여행 (2018)

1.

로마의 마지막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창문의 하얀 커텐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창문을 벌컥 열고 하늘을 확인했다. 아자! 날씨 좋잖아! 어제는 쿨한 척 '비 와도 로마는 좋아'라고 하긴 했지만 역시 맑은 하늘이 최고야! 나는 기운차게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를 하며 생각해보니, 그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너무 느긋하게 돌아다닌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로마에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왜 그렇게 늦잠을 자고 느리게 식사를 하고 터벅터벅 걸어다녔던 건지. 여유를 부렸던 게 마지막 날 와서 괜히 아쉬워졌다. 안되겠다, 오늘만큼은 부지런하게 다니자.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씻고 조식 먹고 옷 갈아입고 하다보니 예상했던 외출 시간보다 늦어버렸다. 사실 뭐, 예약한 것도 없고 일정이 바쁜 것도 없지만, 그냥 늦게 시작하는 기분이라 좀 그랬다.

으으, 마지막 날까지 게으름(?)을 피울 순 없지, 어서 나가자!




나는 괜히 조급한 마음에 숙소를 뛰쳐나갔다.





2.

얼마나 조급했냐면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뛰쳐나왔다.

어, 음, 이런. 우선 어딜 가지?

...그래, 아직 뜨레비 분수에 동전을 안 던졌다. 뜨레비 분수로 가자! 늦기 전에!




엑. 내가 너무 빨리 왔나보다.

뜨레비 분수에선 전날 쌓인 동전 수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다들 동전을 치우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동전을 던질 수야 없지... 오늘 저녁에 던지러 와야겠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왔음에 멋쩍어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가까운 곳이라면...

...그래, 스페인 계단! 스페인 계단으로 가서 따뜻한 햇볕을 쐴 거야. 어서 가자, 늦기 전에!




엑. 내가 너무 빨리 왔나보다.

스페인 계단엔 아직 해가 높게 뜨지 않아 그늘이 져 있었다.

젤라또 하나 입에 물고 따뜻한 햇볕을 쐬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엉덩이가 무지 시려울 거다.




과연 엉덩이 동상에 걸리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는지 이곳에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왔음에 또다시 멋쩍어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그래, 저번에 요리사 형님이랑 봤던 그 바티칸 쿠폴라 보이는 움베르토 1세 다리로 가자! 늦기 전에!




엑. 이번에도 내가 너무 빨리 왔나보다.

그것도 12시간 정도 빨리 온 것 같다.

여길 굳이 아침 일찍 서둘러서 올 필요가 있었을까? 여긴 야경 명소잖아.


...아까부터 나 계속 뭐하고 있는 거지? 마음만 조급하다.




또 어딜가나 초조해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테베레 강변에서 야외상점 매대를 열고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로마는 이제 막 깨어나고 있었다는 걸.

기지개를 펴고 있는 로마 안에서 마음 급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유로운 여행 중에 '늦었다'는 게 있을까? 나는 하나도 늦질 않았다. 유구한 역사를 견뎌온 로마는 여행자를 보채는 도시가 전혀 아닌데, 나 혼자만 괜히 내 가상의 시간표에 쫓겨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뭘 하는 거람. 하하.





나는 테베레 강가에 있는 카페인 Biblio Bar에 들러, 내 조급함을 가라앉힐 차를 한 잔 시켰다. 카페 종업원은 느긋한 태도로 새빨간 티팟에 홍차를 처방해줬다.

나는 차를 받아들곤 볕이 드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카페 이름답게 낡은 책들로 꾸며져 있었다.




차를 한두모금 마시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 내 주변에 앉더니 눈치를 살피며 돌아다녔다. 아마도 테이블 주변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먹으려는 생각인가 보다.

새빨갛고 앙증맞은 티팟과 따뜻한 홍차, 주변을 총총거리는 작은 새와 풀내음, 책등까지 바래어 쌓여있는 책과 뒷목을 간지럽히는 겨울 햇살이 내 초조함에 부드러운 제동을 걸어줬다.




그래, 실은 살면서 가끔씩 이런 초조함이 급작스레 찾아올 때가 있었다. 내가 늦은 것만 같은 기분, 내가 뒤쳐지는 것 같은 기분, 내가 남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서둘러야 할 것 같은 기분, 낙오될 것 같은 기분. 물론 내 주변에 "너는 늦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냥 나 혼자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생각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그것 때문에 바쁘게 일을 추진하여 도움이 된 적도 있었으나, 대개 섣불리 움직이는 바람에 더 안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조급함은 내 인생을 차지하는 많은 것의 독이었다.

그렇지만 봐봐, 오늘 말야, 내가 늦었다고 생각한 모든 시간들은, 이르면 일렀지 사실 늦은 게 아니었잖아.

네 페이스대로 살라는 말, 여유를 가지란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자주 흘려보내고 식상하다 비웃으며 듣질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2800년의 세월을 살아온 로마가 친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진짜로 늦은 거 아니니까, 한숨 돌리라고.





3.

따끈한 홍차와 온화한 겨울 햇살은 날 무장해제 시켰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오전의 티타임을 충분히 즐기다가, 마침내 목적지를 정하곤 천천히 일어났다.

마침 내가 있는 곳은 산탄젤로 근처. 이것저것 숨가쁘게 둘러볼 생각말고 바티칸만 여유있게 둘러봐야겠다. 그러고보니 아직 대성당의 쿠폴라에도 올라가보질 못했다고. 오늘은 거길 가야지.

나는 성 베드로 대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던 도중, 산탄젤로 앞 거리의 한 모서리에서 플룻 부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경쟁하듯 저쪽 먼 곳에선 어떤 여자가 팝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팝 쪽이 듣기 편한지라 사람들은 전부 그쪽에 몰려 있었다. 이러면 왠지 응원해주고 싶다. 나는 홀로 플룻을 부는 남자를 위해 자리를 지켜줬다.

처음엔 잠깐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아름다운 선율을 듣다보니 기분이 좋아져 제법 많은 곡을 듣고 갔다. 아예 팁을 꽤 내고 거의 자리 깔고 봤다. 남자의 연주는 깔끔했다.










꽤 오랫동안 연주를 듣다가 바이바이하고 헤어졌다.

남자의 연주는 제법 소리가 크고 잘 울려퍼져서, 산탄젤로 다리를 건널 때에도 들려왔다. 성스러운 천사의 조각상에 둘러싸여 마음 편안해지는 멜로디를 듣고 있다니 왠지 내 등에도 날개가 돋아날 것 같았다. 티끌 하나 없는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데.




악사의 연주 덕분에 행복하게 테베레 강가를 거닐었다. 걸을수록 행복해지는 이곳은 로마.





4.

산탄젤로에서 몸을 돌려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신호등 앞에 섰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폴라가 보이는 횡단보도 앞.

그러니까 벌써 7년 전, 유럽을 처음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은 늘 그렇듯 그 때도 '바티칸'이었다. 바티칸 박물관과 산 피에트로 광장을 둘러본 우리는, 끝으로 저 쿠폴라에 올라가기로 했다. 그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내가 세웠던 계획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들고 있던 현금이 다 떨어져서, 입장료를 내지 못해 결국 쿠폴라에 오르지 못했다. 무진장 아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돈을 써버린 친구랑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돈이 없는 걸 어떡하겠는가. 잔뜩 풀이 죽었으나, 다행히도 마침 무지개가 떠서 그걸로 위안을 받고 여행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다.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나 비상금 따위의 개념이 없던, 아르바이트로 번 현금만 딱 들고 다녔던 학생 시절이었다. (http://enatubosi.egloos.com/1681619)

그랬던 내가, 흐흐흐... 다시 왔다, 다시 이 바티칸에, 쿠폴라에 오르러 왔다!

7년 전의 가난뱅이 학생이었던 내가 못했던 그걸 하려니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삐져나왔다. 흐흐흐... 보고 있어? 7년 전의 나? 내가 쿠폴라에 오르러 간다고. 오늘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고, 세상에 날씨는 더할나위 없어. 그 때보다 더 좋아.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된 날씨처럼. 흐흐흐...





5.

이대로 쿠폴라로 직진하기에 나는 이미 하나의 정보를 알아버렸다. 바로 이 근처에 정말 맛있는 젤라또 맛집이 있다는 것을.

과거의 나는 젤라또 하나도 손 벌벌 떨면서 사먹는 가난한 학생이었으나, 나는 지금 사회인이다. 그 말인즉, 내가 원하는만큼 젤라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거다. 흐흐흐... 맛난 젤라또를 손에 하나 들고 쿠폴라에 올라주겠어. 흐흐흐...

아마 당시 내 표정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원숭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나는 간헐적으로 입술을 씰룩이며 구글맵을 켰다.

젤라또 가게 이름은 L'Arena Del Gelato라고 했으며, 바티칸으로 가는 대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구글맵을 참고하여 그쪽으로 이동했다.




- 내부 공사중 -


...아니 이게 뭐야! L'Arena Del Gelato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찾은 젤라또 맛집이었다! 근데 왜 지금 공사를 하고 있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문에 달라붙어 내부를 들여다보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글쎄, 공사중이라니까.

아아, 그렇구나. 사회인이라고 원하는만큼 젤라또를 마음껏 먹을 순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돈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이렇게 하나의 교훈을 얻으며 나는 또 한걸음 어른이 되었다. 흑흑.

근처에 다른 젤라또 가게 없나... 아쉬움에 괜히 주변을 서성였다.




우왓! 바로 근처에 있잖아, 다른 가게! 그렇다, 여긴 젤라또 가게 천국 로마였다!

게다가 이곳의 젤라또 가게는 인테리어도 무지 예뻤다. 아담한 사이즈의 가게 크기부터 차양이 달린 유리문, 앞에 서있는 자전거까지 완벽했다. 왠지 L'Arena보다 더 좋아보였다. 이름은 Hedera라고 하는 가게였다.

나는 다시 어깨뽕이 이만큼 올라왔다. 하하. 봐라, 가난뱅이 과거의 이낫 학생. 가고 싶은 젤라또 가게가 문을 닫았으면, 거기보다 더 좋은 가게를 찾으면 그만이야? 나는 돈 많은 사회인이라고. 하하하! 더 맛있는 젤라또를 먹어주마! 아차,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 네 미래니까!




가게에 들어가서 추천메뉴를 물으니 Hedera라는 맛을 추천했다. 시그니처 메뉴이면서도 탑 시크릿한 메뉴란다. 시크릿? 무슨 맛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으나 추천을 하니 그걸 먹어야겠다. 가게 이름을 달고 나온 맛이니 얼마나 맛있겠어.

나는 아까부터 계속 새어나오는 흐흐흐 소리를 멈추지 못하고 주문을 했다. 이상한 사람이니까 빨리 주문받고 내보내야겠다 싶은 표정의 직원에게 젤라또를 받고 길을 나섰다. 보라! 이것이 맛있는 젤라또를 먹을 수 있는 직장인이다! 흐흐흐...




...

......

맛없어...

Hedera는 맛이 이상하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맛인지 특정지을 수 없는 어정쩡하고 애매한 맛이었다. 단 건지, 고소한 건지 잘 모르겠는... 이게 대체 무슨 맛이야. 아, 그래서 시크릿인건가. 재료나 제조과정이 시크릿이 아니라 맛이 시크릿인 것이었다.

이런 젤라또를 먹으려고 값을 지불했다니 과거의 이낫 학생을 볼 면목이 없다. 나이를 먹어도 직장인이 되어도 맛있는 젤라또를 사먹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의 이낫 학생아, 너는 미래에도 그냥 너일 예정이다. 네가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나라고 만능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사실 우리 7살 차이밖에 안나...

저기, 그, 맛있는 젤라또는... L'Arena의 그 젤라또는... 더 미래의 나에게 부탁할게...

나는 어딘가 초탈한 마음이 되어 겸허한 표정을 짓고 산 피에트로를 향해 걸어갔다. 성지를 방문하기엔 흐흐거리던 표정보단 훨씬 나은 표정이었다.





6.

어딘가 차분해진 마음으로 산 피에트로 광장에 도착했다. 젤라또는 이미 해치워버린지 오래였다.




며칠 전 교황 성하의 축사를 들으러 왔을 때 설치된 트리를 봤었는데, 아마 오늘 그걸 철거하는 모양이었다.




산 피에트로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선 짐 수색을 받아야 하는데, 이 줄은 그걸 위한 줄이었다. 옛날에도 이렇게 기다란 줄이 있었던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연초라 사람이 많은 건지, 아니면 짐 수색을 철저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줄을 바라봤다. 그래도 별 수 있나. 들어가려면 서야지. 얌전히 사람들 뒤에서 기다려봤다.

혹시 피렌체 대성당의 재탕이려나, 이대로 30분이고 1시간이고 기다려야하나 싶었으나, 다행히 줄은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었다. 게다가 광장에 볼거리도 많아 주변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니 기다릴만 하기도 했다.




경찰 아찌들.




이 각도 이쁘당.




시원시원한 분수도 구경.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건물이라니 눈부셔.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다보니 벌써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넘나 기쁜 것이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성당으로 들어가는 날 칼과 성서를 든 바울이 맞이해줬다.

사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건 바울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사상이던 간에 그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발전하기 위해선 학문적인 접근과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한데, 기독교에선 그걸 해낸 천재가 바울이었다. 그 정도의 인물이니 기독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 입구를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일테다.

짐작으로는 이 반대편, 그러니까 성당 왼쪽엔 아마도 열쇠를 든 베드로가 서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는 길이니 그냥 휙 지나친 듯. 기억에도 없고 사진에도 없네. 다음번에 올 땐 베드로 동상도 유심히 살펴봐야지.





6.

대성당에 들어왔다. 천창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유난히 밝았다. 오늘의 태양은 겨울답지 않게 정말 강렬하다.





그러고보니 뭔가 천막 같은 걸 대성당 곳곳에 쳐놨다. 시야가 가려지니까 갑갑한 느낌이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앞으론 계속 이렇게 해놓는 건지 잘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으니까 성탄 행사 때문에 쳐놓은 것 같기도 한데. 다른 계절에 또 가면 알 수 있겠지.




대성당에서 제일 인기 많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한 사람이 만들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상이다.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미친 관광객에 의해 수난을 당했던 역사가 있는지라 방탄유리 안에 보관되어 있다.

천재의 역작이기도 하고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인기 많은 작품이다보니 얽힌 썰이 많다.

1) 당시 미켈란젤로는 대금은 안오고 무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역작을 만들어냈는데 어쩌다보니 다른 조각가가 조각한 거 아니냐고 소문이 돌았단다. 억울해진 미켈란젤로, 열받아서 피에타 상이 있던 성당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홧김에 저지르긴 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좀 아니었던 듯, 이후에 "신은 세상을 만들고 자기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는데 나란 놈은 어휴" 정도의 말을 하고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2) 마리아를 너무 어리고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욕을 먹고 논란이 됐단다. 이게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는지라 위험한 상황. 그러나 미켈란젤로 왈, "영원하신 성모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 운운" 하는 말로 회피했다고. 말빨없으면 함부로 조각하기 힘든 세상이었다.

3) 예수보다도 성모가 강조됐다는 점을 꼬집어 비판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단다. 정면에서 보면 조각의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성모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미켈란젤로 왈, 신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 거라고, 이 작품은 신에게 바친 거니까 신경 끄라는 정도의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는데. 근데 진짜 정면이 아닌 상부에서 내려다보듯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로 성모에 품에 누운 예수만이 강조되어 보인다. 하늘에서 바라본 것까지 계산해서 조각한 것이다. 구글에 "pieta robert hupka"라고 치면 상부에서 바라본 피에타 상의 사진 작품이 나온다. 처음에 그 사진 보고 무지 감동했었다. 안보셨다면 꼭 찾아서 보시길.




피에타상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내 눈에 태양빛이 직격했다. 으악 눈뽕!





눈을 부비적거리고 고개를 돌려 제단을 바라봤다. 거대한 발다키노가 서있었다.

발다키노는 하늘 덮개(천개)라는 뜻으로, 제단이나 묘비를 덮는 장식을 말한다. 발다키노 중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작품은 바로 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대형 청동 발다키노다. 만든 사람은 베르니니. 성 베드로의 무덤(진짜인지 아닌지는 별개로)을 덮는 용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엔 너무 많은 청동을 사용해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고.

현재 교황이 미사를 집전할 땐 이 발다키노 아래에서 집전한다고 한다. 이 거대한 천개 아래에서 미사를 드리면 신에게 더 빠르게 닿을지. 신만이 아실 일이다.




베르니니의 이 대형 장식품 때문에 당시 다른 성당 이곳저곳에서 발다키노 유행이 불었단다. 근데 유행 했다는 것치곤 요런 발다키노를 다른 곳에선 본 기억이 없다. 검색해봐도 이 베르니니의 작품만 나온다. 역시 오리지널만이 살아남는건가.

어설프게 따라가지 말자, 기억되는 것은 선구자 뿐이다.




요건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작품의 긴박하고 범상치 않으며 세기말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어렸을 적 자주 읽었던 백과사전의 르네상스 마지막 장,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와 함께 실려있었다. 가뜩이나 론다니니 피에타도 뭉뚱그려진 형태 속에서 풍겨나오는 뭔지 모를 분위기 때문에 심란한데, 그 옆에 실린 이 '그리스도의 변용'은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상황 자체가 무서웠다. 아이의 기괴한 몸 뒤틀림과 사람들의 혼란스러움 위로 하늘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설정. 라파엘로는 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림을 그렸다고 알고 있는데 왜 유작에서는 이런, 약간의 광기와 신내림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는지.

하지만 반대로,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나서야 왜 라파엘로가 르네상스 3대 천재로 꼽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천재는 약간 똘끼가 있어야 하는데 라파엘로의 보통 작품에선 그런 게 느껴지질 않았었다. 근데 이 그림은... 과연 그는 천재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 천재의 그림 때문에 충격을 받아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1999년도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면 약간 저런 느낌으로 내려올 것 같았다. 백과사전에서 그림을 설명하는 단어도 뭔가 '요절', '유작', '최후', '비운의 천재' 어쩌구 하는 자극적인 단어들이라 그 충격이 더했던 것 같다. 그치만 매운 걸 알면서도 먹는 걸 멈출 수 없는 라면 스프처럼, 무서운 건 무서운 걸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나는 결국 이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

하여간 멋진 그림. 제대로 감상하려면 바티칸 박물관엘 가야겠지만, 오늘은 이 모조품으로 만족하련다.




으악! 또 눈뽕!

천창의 각도와 현재 태양의 각도가 끝내주게 일치하나 보다. 자꾸 눈이 먼다. 허옇게 잔상이 남은 눈을 꿈뻑이며, 대충 다 둘러봤으니 쿠폴라로 올라가기로 했다.




소심한 인증샷 하나. 뒷모습 쨘!





7.

대성당에서 나와 성당의 오른편(바울이 서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쿠폴라로 올라가기 위해서다.




기억속의 쿠폴라 매표소.

예전 여행 때 여기가 성 베드로 대성당 안쪽으로 입장하는 줄인 줄 알고 돈도 없는데 줄 섰다가 시간을 깨끗하게 날린 적이 있다. 그래서 쿠폴라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쿠폴라 매표소가 기억 속에 있다.

하하. 과거의 나는 정말 바보였군. 하지만 걱정마라 학생 이낫. 내가 오늘, 과거의 너를 대신하여 쿠폴라 위에 올라간다!

다시 그 푸흐흐 하는 이상한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는 것은 넘나 기쁜 것이다. 흐흐흐...




8유로짜리 티켓을 구입했다. 그새 가격이 올랐다. 옛날엔 5유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벌써 7년 전이다.

하지만 8유로 정도야 껌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금전적으로) 성장했단 말이다. 자, 봐라 이낫 학생. 이 매표소에서 당당하게 돈을 지불하는 어른의 모습을!

아마 매표소 직원은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한 태도로 돈을 지불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짜 자존감 최고인 상태였다. 흐흐흐... 올라간다, 쿠폴라!





목욕물을 다 받아버려서 쿠폴라 올라간 건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덧글

  • hogh 2019/04/15 08:36 # 답글

    돈 떨어져서 못 올라간 일화에서 제가 작년 로마에서 공항행 기차표 살때 잔고가 다 떨어져서 고생한게 떠오르네요ㅋㅋ
  • enat 2019/05/01 23:21 #

    여행 막바지에 현금 떨어지면 곤란해요 ㅠㅠㅋㅋㅋ 저는 그 이후로 여행비 외에 달러를 따로 두둑하게 챙겨갑니다. 남아도 다음 여행의 비상금이 되어줄테니...
  • Sunny 2019/04/15 09:21 # 답글

    사진들을 보니까 저 곳에서 느꼈던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네요.^_^ 로마에서 먹었던 젤라또들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헿
  • enat 2019/05/01 23:24 #

    아~~~ 오늘 날씨가 꼭 저 날의 로마 날씨 같았어요! 와일드바디와 옥수수 아이스크림을 아쉬운대로 냠냠거리고 먹었는데 진짜 젤라또가 그립더군요 ㅋㅋㅋㅋ
  • 봉학생군 2019/04/15 10:26 # 답글

    바티칸 근처셨다면 젤또는 old bridge 추천드리긴 합니다. 거기 석류맛이 기억에 남네요
  • enat 2019/05/01 23:24 #

    다음에 가면 올드 브릿지란 젤라또 가게를 가볼게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당
  • 에스j 2019/04/16 16:43 # 답글

    한적~한적한 느낌이 사진에서 묻어나서 너무 좋아요! :)
  • enat 2019/05/01 23:25 #

    요새는 여행가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보다 저런 한적함이 좋더라구영!! 몸이 게을러졌어요... ㅋㅋㅋㅋ
  • 2019/05/01 16:3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5/01 21: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