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6 17:25

겨울 유럽여행 (40) 바티칸 : 여행의 끝 ├ 겨울 유럽여행 (2018)

1.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돔, '쿠폴라(Cupola)'는 우리가 아는 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전까지 전임자들에 의해 그려진 설계안과 당시 최고의 쿠폴라로 찬사받던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대성당을 참고하여 (이를 위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피렌체 대성당의 쿠폴라에 올랐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말년에 맡은 작업이었기에 그는 설계와 기초 공사만 끝낸 뒤 세상을 떠났다. 중앙 돔이 완공된 것은 그의 사후 26년 뒤였다.

이 위대한 쿠폴라가 그로부터 400년 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불러일으킬지, 설계 당사자는 알고 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의 죽음 이전으로 날아가 알려주고 싶다. 당신이 설계한 그 쿠폴라가 아직까지 건재하며 전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물론 미켈란젤로는 당연한 결과라며 코쓱하고 조각하러 갈 것 같지만 말이다.





2.

드디어 쿠폴라에 오른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해서 입장했지만, 무수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초반에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있으나 쿠폴라 입구까지만 데려다주는 거고, 그 앞에 수백 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뭐 괜찮다. 엘리베이터도 사실 필요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두 다리로만 오를 수도 있다고. 오르는 건 내 전문이다. 나는 강인하고 튼튼하다. 아직 몸도 마음도 청춘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 역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태워준다는데 안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흠흠.




엘리베이터를 타고 쿠폴라 입구까지 왔다. 멀리서 볼 땐 대성당의 일부를 담당하는 구조물로만 보였는데, 바로 아래에서 보니 대성당과는 별개의 단일 건축물로 보였다. 옥상 위의 거대한 옥탑방 느낌이라면 너무 저렴한 비유일까. 하여간 규모부터 비범했다.

입구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니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돔 내부의 구조물에 도착했다. 안전 때문에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까 아래에서 본 거기가 맞는지?

아예 다른 곳처럼 보이는 탓에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가 언뜻 보였다. 저런 어마무지한 천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고서야 어디에 있겠어. 아까 거기가 맞군.




돔 내부 둘레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라틴어라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베드로, 열쇠 어쩌구 하는 말인 것 같다.

나중에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정확히는 이런 뜻이란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가 찍은 부분은 '내가 줄거당'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이건 돔 내부에서 바라본 채광창과 천장화. 엄청 가깝게 보인다. 채광창 둘레에 적힌 건 이런 내용이란다.

S. PETRI GLORIAE SIXTVS PP. V. A. M. D. XC. PONTIF. V.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해 1590년에 중앙돔이 완공되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다음 교황인 그레고리오 14세가 새긴 문구라고 한다.




돔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 윗부분의 모자이크.

당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거고 아래에선 요 안쪽 벽면따위 보이지도 않을텐데, 이런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이 건물은 종교적 건물이 맞다. 신에게 바치는 건물이라면 하늘과 가까운 부분을 더 아름답게 꾸며야 했겠지.





3.

돔 내부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현실을 직시하고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신에게는 아직 320개의 계단이 남아있습니다.




좁고 가파르다. 여기서 불나면 어떻게 탈출하지. 아마 탈출 못할 것 같다. 포기하고 계속 위로 올라갔다.




이런 어지러운 계단을 따라 위로 위로.




계속 위로 위로. 사람이 밀려있다. 정체 구간이다.




모르는 아저씨의 엉덩이를 보며 밧줄을 붙잡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땀에 찬 회색빛 엉덩이를 보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르고 싶었으나 뒤쪽에 사람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바짝 붙어 올라가야 했다.

연옥의 산을 오르듯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괴로워하며 한발 한발 내딛었더니... 곧 정상이었다.





4.

여기서 수백개의 좁다란 계단을 오른 이들의 행동이 반으로 갈린다. 반은 숨을 고르기 위해 구조물에 걸터 앉아 헐떡이고, 반은 헐떡이는 그 상태로 신이 나서 펄떡인다. 나는 강인하고 튼튼한 청년(!)이기 때문에 당연히 후자였다.

그 유명한 천국의 열쇠와 그 너머의 로마를 바라보기 위해 전망대로 달려갔다. 모든 전망대가 그러하듯 안전을 위한 펜스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다들 전망을 조금 덜 방해받고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눈을 펜스 사이로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나는 둥근 전망대를 따라 걸으며 내가 보고 싶었던 그 유명한 뷰가 보이는 포인트를 찾았다. 때마침 그 앞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몸을 최대한 펜스 앞에 붙이고 눈을 들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천국의 열쇠를 그리고 있는 성 베드로 대광장과 대성당, 그리고 로마 시가지.

마음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정상에서 불어오는 1월 로마의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통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 이거였지?
- 응, 이거였어.


누군가에겐 유럽여행의 필수 코스일테고, 누군가에겐 신성한 종교적 성지겠고, 누군가에겐 인증을 위한 장소이며, 누군가에겐 촬영을 위한 명당이고, 누군가에겐 일생의 간절한 풍경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과거의 내가 남겨둔 감동이었다.

7년 전의 이낫 학생은 실수로 이 장면을 빼먹은 게 아니었다. 이 장면의 이 감동을 지금의 나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훨씬 더 아름다운 날씨에, 더 적절한 시간대에, 보다 성숙한 정신으로 감상하라고.

기특한 녀석이다. 어쩌면 나보다 나은 거 아냐? 과거의 나.




됐다.

이제 집에 가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폴라에서 본 풍경은 여행의 끝을 고하는 풍경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여행 중에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빠르게 쓰기 위해 일기장을 펼쳐놓은 채로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런데 지금 막 내 여행이 끝나버렸고, 이제 여행기를 적을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어 '쿠폴라에 올랐다'라고 적었다. 그리곤 바로 접어 가방의 잘 열지 않는 칸에 넣고 잠갔다. 이제 저 노트를 읽기 위해 펼칠 수는 있어도 적기 위해 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여행이 끝났다. 지금부터는 여행중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는 중이다.





5.

후련해진 얼굴로 구조물에 걸터 앉으려는데, 저쪽에서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걸 한 장 찍어주고 다시 구조물에 걸터 앉았다.

음... 나도 사진을 찍어볼까?




셀카 모드로 바꾸고 생글생글 웃으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하는데, 웃고 있는 나를 더 밝은 미소로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뒤에 계셨다. 뒤를 돌아보자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씨익 웃었다. 그러곤 눈을 감고 무언가 회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

당시엔 뭔지 잘 모르겠어서 갸웃하고 말았지만, 이후로 이 사진을 확인할 때마다 이름 모를 할아버지의 깊고 따뜻한 미소가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젊은이를 보며 뒤에서 흐뭇하게 웃어줄 수 있는. 나중에 할머니가 되면 이 할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할머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

다시 수백개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쉬울 줄 알았으나 계단의 폭 때문에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중앙 쿠폴라에서 내려왔다. 아직은 대성당 위쪽이다.

그런데 요 성당 지붕 위, 작은 돔들과 성물을 파는 가게가 꼭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넓직해서 높은 곳이라는 생각도 잘 안들었다. 날씨도 화창하니, 어디 예쁘장한 소도시의 골목길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요잇! 다들 여기서 인증샷을 찍고 있길래 나도 그림자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다리 근육도 풀 겸, 이번엔 엘리베이터 말고 걸어서 내려갔다.




지상에 내려왔다. 잠깐 올라갔다 내려온 것 같은데 태양의 위치가 많이 변해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나보다.

혹시 저번처럼 무지개가 안뜨나 내심 기대했지만, 생각해보니 이번엔 위로 받을 것이 없었다. 그런 행운은 7년 전의 이낫 학생처럼 좀 더 어리고 마음 여린 친구들에게 나눠주셨으면 좋겠다. 무지개가 필요없는 감사한 여행이었다.




알록달록한 스위스 용병들을 뒤로 하고 대성당을 나섰다.




대광장 분수 근방에서 값싼 로마 엽서 다발을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딱 봐도 보급형의 저가 엽서였는데, 그래도 기념인지라 주머니에 동전이 남아있는만큼 샀다.

그 엽서 다발, 나중에 새 직장엘 가서 두어장씩 뜯어 나눠줬다. 다들 신기해하며 받더라. 나중에 친해진 다음에 들었는데, 엽서가 신기했던 게 아니라 첫 출근하자마자 밝은 얼굴로 주섬주섬 엽서 꺼내서 나눠주는 모습이 디게 신기했다고 한다. 좀 특이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고. 하하!





7.

배가 고프다.

시계를 보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지 6시간이 흘렀다. 아침부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기다란 산 베드로 대성당의 입장 줄도 서고 전망대로 가는 연옥의 산도 오르느라 아침에 섭취한 모든 칼로리를 소모해버렸다.

여행은 끝났다고 선포했으나 집에 돌아가려면 밥은 잘 챙겨먹어야 한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미칠듯한 고기 냄새에 정신이 팔려 홀린 듯 걸었다.




냄새의 끝엔 햄버거 집이 있었다. 아마도 패티 냄새였나보다. 저 건물 옆에서 나는 연기를 보시라. 저게 패티 굽는 연기다. 저렇게 뿜어내니 거리가 고기 냄새로 진동을 하지.

그나저나 로마에서 햄버거를 먹어도 괜찮을까? 느린 음식을 좋아하는 애들의 나라에서 햄버거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빠른 음식을 먹어도 괜찮은 걸까...

...하며 고민하기에 난 너무 굶주려있었고 패티 굽는 냄새는 환상이었다. 그래서 들어갔다.

The Meat Market Roma (Grill이라고 크게 써있음, Corso Vittorio Emanuele II, 320, Roma RM, 이탈리아)




들어가자마자 맥주를 시켰다. 이탈리아 라거 맥주 페로니.

공복에는 역시 맥주다. 맥주라는 훌륭한 에피타이저가 있기에 햄버거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다. 호로록. 호로록.




곧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와씨.

햄버거. 마이쪙. 하씨.

계속해서 '와씨', '하씨' 등등의 성씨를 찾으며 먹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굶주려 있었나보다.

힘이 빠졌을 땐 역시 햄버거다. 저가의 고열량 음식! 뭐 이건 수제라서 저가까진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7년 전 학생 enat도 로마에 와서 먹은 건 버거킹 햄버거 밖에 없었다. 봐라, 학생 enat이여. 너는 7년 후에도 로마에서 햄버거를 먹을 운명이다. 너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맥주가 있으니 햄버거가 꾸역꾸역 더 잘 들어간다. 감튀까지 깨끗하게 해치우고 나왔다.





8.

그 이후엔 뭐... 슬슬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은 오로지 햄버거를 소화시키기 위해 멍한 정신으로 로마의 늦은 오후 거리를 돌아다닌 사진들이다. 일기장에도 적혀있지 않은지라 사진만 올린다. 대부분이 숙소 근처 - 그러니까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근처다.






















9.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잠깐 낮잠을 잤다.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오지 않음을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왠지 동전만 던지러 나가기엔 내 피곤한 몸을 일으킬 명분이 충분치 않았다. 저녁을 먹을까 했으나 아까 먹은 햄버거가 워낙 배불렀기에 식사는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달달한 디저트가 땡겼다.

누워서 검색을 해보니 로마엔 폼피라는 티라미수 가게가 짱이란다. 티라미수? 그래, 이탈리아 왔는데 티라미수는 먹어줘야지. 티라미수라면 몸을 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치는 스페인 계단 쪽. 그럼 트레비 분수 갔다가 스페인 계단으로 가면 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자, 나가자. 동전 던지기와 티라미수를 위해.

아래부턴 오로지 동전 던지기와 티라미수를 위해 멍한 정신으로 로마의 저녁 거리를 돌아다닌 사진들이다. 역시 일기장에 적혀있지 않은지라 사진만 올린다.























10.

다음날 새벽, 일주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준 "카이사르 하우스 레지덴츠 로마네"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길엔 겨울비가 많이 내렸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내가 간다고 로마가 슬퍼하나 보다. 장맛비처럼 굵은 빗줄기를 보며 로마에 작별을 고했다. 또 올게.

비가 하도 많이 내려 버스가 늦어지거나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공항에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지연도 없었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면세점에서 올리브 오일이나 트러플 등을 많이 살까 했는데,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우왓, 너무해. 아쉬웠지만 돈을 아꼈다 생각하고 말았다. 어차피 많이 사가도 여기서 먹는 그 맛은 안날거다.

쇼핑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제 먹은 햄버거가 생각났다. 공항이니까 어디 햄버거 가게가 있겠지. 그래서 또 패티 냄새를 찾아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근처에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당당하게 들어가 착석을 하고 주문을 하니, 웨이터가 '이런 이른 아침에 그렇게 헤비한 햄버거를 먹는다고?' 따위의 경악이 담긴 표정으로 내 주문을 받아줬다.

흥, 뭘 먹을지는 내 마음이지. 나는 생각보다 아침에 햄버거 먹는 걸 좋아한다. 서양권 애들은 보통 아침에 계란에 과일 따위나 빵에 커피, 많이 허기지면 브랙퍼스트 샌드위치 정도로만 먹는다. 그래서 아침에 햄버거를 시키면 프랩해놓은 재료가 없어서 거의 모든 재료를 새로 준비하고 새로 굽고 새로 튀겨서 준다. 이게 또 엄청 꿀맛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배웠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너 때문에 직원들이 더 일해야한다고, 나쁘다고 했다. 어? 그런가? 그럼 나쁜 걸로 하자. 갓 구운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면 내가 나빠도 괜찮다. 냠냠.




오로지 나를 위해 번거롭게 준비된 (이런 걸 따지는 걸 보면 나도 참 변태다) 햄버거 세트가 도착했다. 이렇게 나오는 햄버거는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재료의 프레시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그걸 감안한다 해도 햄버거가 보통이 아니게 맛있었다. 공항에서 파는 햄버거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건가... 로마는 공항 햄버거조차 격이 다른 것인가... 전날 햄버거 먹으면서 '와씨'와 '하씨'를 찾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누구씨를 자꾸 찾으며 먹었다. 로마는 역시 햄버거다.

배도 부르고, 이제 비행기 타는 일만 남았다.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11.

귀국.

나는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겨울에 유럽으로 여행을 간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많이 쌓게 됐다. 이제 겨울이 그렇게 싫지 않다. 내 생일도 그렇게 외롭지 않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도 쓸쓸하지 않다. 겨울비는 운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흐리고 어두운 날씨엔 조명이 더 돋보여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

겨울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더 큰 수확이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이후에 내 앞을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일들 뿐이었다.

재개발 때문에 이사를 갔고, 몇 개월 뒤엔 독립 준비를 해서 나갔다. 여행 가기 전 컨택했던 벤처 기업으로 회사를 옮겼는데, 벤처 기업이 으레 그렇듯 모든 일들이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도와주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꽤 고생했다. 몇 차례의 발표와 출장과 전시를 아기가 걸음마하듯 알음알음 하고, 아마추어틱한 모습을 벗기 위해 노력하고, 무시도 망신도 많이 당해보고, 그만큼 인정도 감사도 많이 받아봤다. 여행이 끝나고 그 이후의 1년을 돌이켜보자면 오히려 그 쪽이 더 여행이고 모험이었으며 도전이었다.

아마 내 능력으로는 벅찼던 여러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힘은 이번 유럽여행 같은, '배낭여행'에서 온 것 같다. 여행 중인 장소, 여행하는 기간, 여행하며 세운 계획, 여행하며 알게 된 지식, 여행하며 알게 된 자신의 무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에서 만난 장면들, 여행 중이라는 감각 그 자체, 필연적인 계획의 틀어짐, 어쩔 수 없는 수정안, 새로운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습득하는 자세, 뭐 그런 것들이 내 삶을 도와줬다. 정말이다. 여행은 내게 있어서 훌륭한 예행 연습이었고, 그를 통해 나는 내 인생을 열심히 여행할 수 있었다.

나는 남들에 비해 약하고 서투른 인간인데다가 기억력도 짧아 이 예행 연습을 곧잘 해줘야한다. 엄마는 내게 대체 혼자 여행을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냐고 하셨지만, 나는 재미 때문에 여행을 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게 서툴러서 그걸 연습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렇게 답했더니 말은 참 잘 지어낸다고 하셨지만. 하하.

앞으로도 나는 그 삶의 예행 연습을 계속할 거다. 이건 아무래도 양보할 수 없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지만, 만약 언젠가 예행 연습이 필요없어질 만큼 삶에 능숙해진다면, 이리 휙휙 떠나는 일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까진 계속 여행할 거다.





끝!





덧글

  • 에스j 2019/05/06 22:29 # 답글

    으아아아, 정말 끝내주는 풍경이었군요. 여행을 통해 얻는 경험이란 게 단순하게 정의되진 않아도 본인만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면 훌륭한 여정이었다고 회상되는 것 같아요 (bravo my life~!). 아우우우 유럽여행가고 싶어지네요. :)
  • enat 2019/05/19 13:43 #

    사실 여행 가서 아무리 대단하고 멋진 감상과 감각을 느끼고 돌아와도 그 99%는 일상에서 다 잊어버리는 느낌인데 요로케 포스팅을 하면 그래도 쪼끔은 더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것 같아용! 간신히 기억에 남는 1%가 조금씩 절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구... 여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저도 이탈리아 다시 가고 싶어요~~~~~
  • 2019/05/08 11:0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5/19 13: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이온 2019/05/07 23:08 # 답글

    마치 직접 다녀온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후기 감사했어요! 예행연습 없이도 능숙해지는 어느날이 다가오길 바라면서도, 여행기를 읽으며 신나는 독자 입장에서는 enat님의 여행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요 :)
  • enat 2019/05/19 14:01 #

    제 여정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세상에 능숙해지기엔 아마 3백만년은 남은 것 같습니다! ㅋㅋㅋ 저는 아무래도 앞으로도 많고 많은 여행을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계속 함께해주시죵!
  • 2019/05/08 11: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5/19 14: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5/20 09: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5/26 22: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여리여리한 바다코끼리 2019/05/10 21:11 # 답글

    버스 안에서, 쉬는 시간에도 enat님의 여행기를 세상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읽었어요 :D <<<이렇게

    enat님의 여행기를 너무 재밌게 읽어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이 감사의 댓글을 답니다!!
  • enat 2019/05/19 14:10 #

    제 여정과 함께 잠시나마 숨 돌리실 수 있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여행 중 느꼈던 행복한 감각들이 바다코끼리님께도 전달될 수 있었다니 넘 기뻐용...
    댓글 감사드리며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2019/05/10 22:35 # 삭제 답글

    쿠폴라 마지막 구간은 정말 좁고 가팔라서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여행으로 일상에서 도피라기보다는 예행연습이라니
    멋져요!!!
  • enat 2019/05/19 14:14 #

    맞아요! 앞사람의 응등이만 보고 간신히 올라가야했던 그곳... 역시 만만치 않은 곳이었어요 그만큼 풍광은 또 멋졌지만 말이죠!

    도피로 시작된 여행이더라도 자꾸 연습하게 하더라고요... 사는 법을요! 길이 도통 절 내버려두질 않아서 이것저것 잔뜩 연습한 뒤 삶 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습니당 ㅋㅋㅋ
  • LionHeart 2019/05/18 20:50 # 답글

    오랜만에 방문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재미있는 여행기가 업데이트 되어 있어 기쁩니다.
    이번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특히 쿠폴라 오르는 여정에서의 앞 사람 엉덩이에 대한 묘사와 거기서 느낀 고생이 제가 경험한 것 같이 느껴지는군요.
    마지막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정말 멋집니다. ;ㅁ;/b
    아...저도 떠나고 싶어지네요.
  • enat 2019/05/19 14:20 #

    우왓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저도 밀린 포스팅에만 집중하느라 다른분들 블로그에 도통 방문하질 못하고 있었네요 @.@ LionHeart님의 멋진 사진을 보러 가야하는데...!!
    마지막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은 앞으로 한국가면 어케 살까 잘 살 수 있겠지 으으 두근두근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당... 으흐 그 때의 떨림 긴장 설렘 등등이 아직도 선명하네욥
    마지막 문장에서 왠지 비행기 표를 결제하시는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ㅋㅋㅋ 미래의 여행기 기대합니다!
  • 이글루스 알리미 2019/05/20 08:06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5월 20일 줌(http://zum.com) 메인의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여행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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