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2 10:37

타이베이 주말여행 (2) 베이터우 공중 노천탕 ├ 타이베이 주말여행 (2019)

1.

도미토리에 코고는 아저씨가 있어서 잠을 못 잘거라 생각했는데 엄청 잘 잤다.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받아들이고 새근새근 잠든 것 같다. 덕분에 컨디션이 제법 괜찮았다. 코고는 아저씨 땡큐해!




짐을 가볍게 챙긴 뒤 호스텔에서 조식을 해결하고 밖으로 나왔다. 호스텔 조식은 그럴 듯하게 생기긴 했는데 맛이 없었다. 먹거리의 천국 타이완에서 맛없는 아침을 먹다니 슬프군. 내 입맛을 위로해줄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며 교통카드도 함께 구입했다. 타이중에서 사놓았던 교통카드가 본가에 있을텐데 여행 전에 본가에 들릴 여유가 없어서 그냥 새로 샀다.




아이패스 교통카드, TWD 200 (카드값 TWD 100 포함)


이지카드를 사려고 했는데 직원이 아이패스 카드를 줬다. 직원에게 왜 이지카드가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거란다. 티머니와 캐시비 같은 느낌인가?

나중에 웨이를 만나 그가 가지고 있던 이지카드와 비교를 해봤는데, 지하철 개찰구에서 카드 찍을 때 소리가 다르더라. 하나는 삐! 소리가 나고 다른 하나는 삐이↘ 소리가 났다.

나 : 이거 봐! 소리가 달라! 정말 대단한 차이로군!
웨이 : ...이상한데서 관찰력을 낭비하지마.


관찰력 낭비한 정보 말고 뭔가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찾아보니, 아이패스는 철도 및 타이완 전지역을 커버하고 가오슝 지역의 자전거 결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 이지카드는 타이베이에서 주로 사용하고 보증금 환불이 가능해서 단기 여행자들한테 좋다고 한다. 요런 소소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니 궁금하시다면 구글링 해보시라. 귀찮으시다면 알아보지 말고 그냥 아무거나 사서 쓰시라. 뭘 쓰던 간에 시내에서 사용하는데엔 아무 지장 없다.

교통카드엔 키티가 그려져 있었다. 예전에 대만 항공사인 에바 항공의 비행기가 키티로 도배되어 있던 게 생각났다. 얘네 키티 너무 좋아하잖아. 나는 키티의 저 무심한 듯한 표정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교통카드에 그려져 있던 건 색감이 어둑하니 앤틱해서 괜찮았다.

자, 요 키티 카드를 들고 어디엘 갈까.





2.

오늘 오후엔 단수이에서 대만 친구인 웨이를 만나기로 했다. 단수이는 MRT 빨간선의 종점에 있다.

단수이로 가는 길에 구경할 만한 곳이 있을까 찾아보니, 남쪽에 베이터우 온천이라는 곳이 있더라. 꽃보다 할배에도 나온 곳이라 한다. 오전 중엔 거길 갔다가, 오후에 단수이로 이동하면 되겠다.

이 날의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일정 : 오전 (베이터우) → 오후 (단수이 with 웨이) → 저녁 (라오허제 야시장 with 웨이)
* 사실 저 일정엔 스린 야시장이 동선상 더 좋긴 하다. 내가 스린엘 가봤다고 하니 웨이가 이번엔 라오허제를 가자고 해서 그쪽으로 간 것 뿐이다.

그럼 우선 베이터우 온천을 향해 가보자. MRT 빨간선을 타고 베이터우 역으로 이동했다.




Taipei Main Station → Beitou Station (빨간선)


작고 귀여운 타이베이의 전철 MRT.

타이베이를 여행하신 분이라면 다들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데, 나는 이번 여행에서야 처음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MRT에선 쾌적한 환경을 위해 승객들의 음식물 섭취를 금지하고 있으며, 어길 시엔 제법 엄격한 벌금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된 건 이 날 저녁이었다. 저녁에 웨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야시장으로 가던 도중, 목이 말라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병을 꺼냈는데, 웨이가 기겁을 하며 날 혼냈다. MRT 내에선 물도 마시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벌금이 우리나라 돈으로 30만원 정도로 제법 쎄다고.

나 : 물도 안된다고? 엄청 빡빡하다.
웨이 : 한국은 안그래? 한국은 우리보다 더 쎈 벌금 내는 거 아냐?


어리둥절한 웨이에게 한국에선 뭔가를 먹으면 눈총을 받으니까 안먹을 뿐이지, 벌금을 내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웨이 왈, 서울에 왔을 때 탔던 지하철이 몹시 깨끗해서 틀림없이 벌금이 비쌀 것이라 생각했단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선 목이 말라도 꾹 참고 내려서 물을 마셨다고. 하하.




그러나 오전 중엔 뭘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도 모르고 쿨쿨 자면서 갔다. 지하철 같은 운송수단만 타면 잠이 오는 탓이다. 차라리 잘됐다. 자면서 안갔으면 간식거리를 꺼내 먹었을텐데 그랬다간 벌금을 물었을테니...

한 30분 정도 갔을까. 베이터우 역이라길래 잠에서 깨어나 내렸다. 나는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 자다가 역이나 정거장을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몇 안되는 내 장기 중 하나다.




베이터우 역에서 내려 역사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베이터우 온천이라 베이터우 역에 내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봐도 베이터우 역에서 바라본 뷰는 온천뷰도, 관광지 뷰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 사는 동네였다.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했나?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어 검색했다.




한 파워블로그님께서 올려주신 자료에 의하면 베이터우 온천은 베이터우 역에서 신베이터우 역으로 이동해야 갈 수 있단다. 아직 하나의 관문이 남았던 것이었다. MRT 노선을 보니 베이터우 역에서 짤막한 노선이 삐쭉 나온 것이 하나 보였다. 아하. 저기구나.

두리번거리며 열차를 갈아타러 갔다. 그러나 아까 검색하면서 시간을 잡아먹은 통에 신베이터우로 가는 열차가 눈 앞에서 떠났다. 우잉! 앙대! 슬퍼하며 시간표를 확인하니 거의 10분에 한 대 꼴로 있더라. 걱정할 필요가 없군. 금방금방 다니는구나. 얌전히 기다렸다가 다음 열차에 탑승했다.





Beitou Station → Xinbeitou Station






3.

실은 신베이터우 역에 내리면 작은 시골 마을이 나올 줄 알았다. 펼쳐진 논밭과, 뛰노는 코찔찔이 아이들과, 나무로 만든 작은 건물들과, 수줍은 웃음의 기념품점 직원들과, 저 멀리서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는 소들과, 피어오르는 온천의 수증기...

'온천 마을'이라길래 아무 근거도 맥락도 없이 그런 이미지를 상상했다.

그런데 신베이터우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어... 어? KFC...? 그리고 고층 건물들... 어어... 허허.

신베이터우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번화했더라. 역 앞은 KFC, 맥도날드, 스타벅스, 모스버거, 요시노야 등등의 다양한 다국적 프랜차이즈 점포들로 가득했다. 하긴, 온천은 휴양지고 휴양지는 돈이지. 특히나 일국의 수도 바로 근처에 있는 온천이라면야 개발이 안 될 수가 없지. 아직 프랜차이즈 호텔이나 카지노가 없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유명하다는 지열곡(Hot Spring Valley)을 둘러본 뒤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온천수의 진원지는 신베이터우 역에서 1km, 그러니까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으나, 계곡을 따라 중간중간 구경할 만한 곳도 있고, 길이 오르막길이기도 해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도달할 수 있었다.

지열곡까지 가는 길에 중간중간 들렸던 관광지를 차례로 올려본다.





1) 베이터우 온천 박물관 (입장료 : 무료)

타이완의 일제강점기 시기에 만들어진 온천탕으로, 전후 방치되다가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재탄생하게 된 박물관이다.





외관은 이것저것 섞여 있었다.

2층 왼쪽, 바깥 외장벽의 덧댄 나무와 볼록 튀어나온 창문만 봤을 땐 유럽식 저택 같은데, 2층 오른쪽 기와 지붕과 기둥이 세워진 복도를 보니 중명전 같은 전각이 떠오른다. 1층은 벽돌 외벽에 스테인드 글라스와 좁은 창문으로 꾸며놓은 게 꼭 어디 서양 교회나 수도원 같은 느낌이다.

뭔가 당시에 유행한 양식들을 부분부분 섞어 놓은 듯한 느낌? 예쁘긴 했다.




안에 들어가면 요로코롬 신발장 키와 실내화를 준다. 신발장의 나무 키가 옛스러워서 한 장 찍음.




출입구는 오르막길 2층으로 통해있다. 들어가자마자 다다미가 반겨준다. 외관은 그렇게 서양식이더니 안쪽은 일본식이다.

우리나라 구한말/대한제국 시기의 건축물이 떠오르는 걸. 여기도 그 즈음에 지어졌겠지.





다다미에 앉을 수 있다길래, 실내화를 벗고 들어가 철푸덕 앉아봤다.

복도의 기둥과 기둥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기가 막힌 바람이군. 쉬기 딱 좋은 자리다. 관광지만 아니면 누워서 한시간 정도만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복도에 서 계신 관광지 안내 직원 (자원 봉사자?) 분들의 시선이 따갑다. 그래서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1층으로 내려갔더니 온천탕으로 쓰였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날엔 1층 대욕장에서 온천을 즐기고, 2층 다다미에서 땀을 식히며 쉬었을 것이다. 부럽다. 나도 즐기고 싶다. 그렇게 운영해주면 좋을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데. 이런 곳은 늘 박물관이 되어 있다. 흑흑.






새하얀 내벽과 나무 창틀, 아치형 구조 옆 스테인드 글라스... 요래 예쁜 곳에 사람도 없는 것이, 고요하게 거닐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여기서 온천을 즐긴 건 아니지만 마치 온천 하고 땀 식히고 푹 쉬다가 나온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잔뜩 힐링힐링했다.





2) 베이터우 시립도서관 (입장료 : 무료)

베이터우 공원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타이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한 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위 사진의 왼쪽 건물이 베이터우 시립도서관 건물.




이곳은 바이오 소재의 지붕과 태양열/빗물 이용 관리 시스템을 가진, 타이완 최초의 친환경 도서관이다.

이따 온천욕을 즐기고 내려오는 길에 들러봐야겠다. 부들부들한 상태로 목재 건물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기분이 넘나 좋을 것 같다.





3) 매정 (입장료 : 무료)

타이완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서예가인 위유런이 지내던 곳이라 한다. 1930년대에 일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외관 사진을 깜빡했다.




구글 스트리트 뷰님께서 제공해주신 매정 외관.

건물은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위유런의 서예 작품을 볼 수 있는 쉼터로 운영하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청렴했던 고위 공직자' 위유런은 중국과 대만 양국에서 모두 존경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에 관해 논할 때면, 저 작은 따옴표 안의 수식어구를 늘 사용한다고.

우리나라와의 연결고리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 하얼빈 역 의거에 대한 평론과 특집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었던 중국의 민우보는, 위유런이 발행한 신문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는지, 그에 관한 여러개의 소논문도 발표했다고 한다.




위유런은 서예 작품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청렴한 정신은 글씨에도 영향을 끼치는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더티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란 건데...

여튼 타이완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딘타이펑에 가서 만두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의 글씨를 본 적이 있는 게 된단다. 그 유명한 '딘타이펑 鼎泰豊'의 간판 글씨를 위유런이 적어줬다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그렇게 모시려고 했던 인재가 위유런이었는데, 장제스가 한 발 빨랐고, 결국 위유런은 타이완으로 넘어오게 되며 이곳에서 숨을 거둔다. 위유런 사후, 마오쩌둥은 타이완으로 넘어간 위유런을 탓하지도 않고 그저 몹시 슬퍼하며, 전국 각지에 흩어진 위유런의 서예 작품을 거둬들여 귀중히 보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확실히 남다른 사람이긴 했었나보다.





4) 지열곡 (입장료 : 무료)

원 거주자의 마음새처럼 시원하고 아늑했던 매정에서 나와, 슬슬 베이터우 온천 지역의 하이라이트인 지열곡을 보러 간다.




오르막길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펄펄 끓는 온천수의 진원지까지 이어진 산책로를 만난다. 근처부터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한다.

여기 산책로의 시작점에서 얼마 걷지 않아, 섭씨 90도에서 100도까지 육박하는 옥색빛 지열곡과 만나게 된다.





조용하게 끓어오르는 옥색의 연못.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뭐 이런 문구가 어울리는 풍경인 걸...




이곳은 진짜진짜 덥다. 가뜩이나 타이완도 더운데 저 근처는 더 덥다. 저 에메랄드 빛의 온천수 온도는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100도에 달한다. 요런 온천 자연 구역은 볼리비아의 솔 데 마냐나나 일본의 나가사키 운젠지옥을 본 게 다인데, 그 땐 날이라도 서늘했지, 이렇게 주변이 찜통이진 않았다. 마치 찜기에 들어간 만두가 된 기분이다.

예전엔 저 아래까지 내려가 계란을 삶아 먹는 등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전 문제로 닫았다고. 닫은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100도씨의 물이다. 잘못하면 진짜 죽는다고. 안전제일이다, 안전제일.




잠시 둘러보는데도 더워서 땀범벅이 됐다. 인증샷 찍고 얼렁 빠졌다.





땀을 식힐 겸 계곡 바로 옆 기념품 점에 들렀다. 에어컨 바람 맞으며 땀만 식히고 가려고 했는데 엽서와 마그네틱이 눈에 들어와 구입해버렸다. 고양이들과 베이터우 관광지가 함께 그려진 엽서와 지열곡이 그려진 작은 마그네틱이었다.

엽서 2개, 마그네틱 1개, TWD 160

직원 분들 중 몇몇 분들은 장애가 있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 타이완은 장애가 있어도 능력이 된다면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는데, 아마 이곳도 그런 것 같았다. 약자가 살기 좋은 나라다.





4.

왜 지열곡이 하이라이트라고 하는지 알겠다. 그 땀나는 연못을 다녀오니 다른 곳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젠 지쳤다... 지열곡에서 자연 찜질하며 실컷 땀을 뺐으니, 이제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만 남았다.

베이터우엔 공중탕, 개인탕, 실내탕, 노천탕 등 다양한 온천을 구비한 온천장들이 많다. 사실 베이터우에 오기 전, 내 계획은 개인탕을 빌려 느긋하게 쉬는 거였다. 베이터우에는 제법 괜찮은 고급 온천들이 있는 편이었고, 미리 다녀온 친구에게 추천도 받아놨었다.

그러나 4월의 타이완은 몹시 더웠고, 특히나 지열곡에 막 다녀온 직후여서 비싼 돈 내고 뜨거운 것에 몸을 담그기 싫어졌다. 그냥 딱 문화체험 수준, 그러니까 맛보기로만 즐겼다가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개인탕을 빌리는 건 수지가 영 맞질 않았다.

그래서 저렴한 값의 공중 노천탕엘 가보기로 했다. 그럼 딱 10분만 즐겨도 아깝지 않겠지.




그리하여 가게 된 곳은 친수공원 노천온천이라는, 꽃할배에도 나왔다는 공공 노천탕이었다.

남녀혼탕 노천탕이라서, 수영복이 필요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영복을 챙겨오긴 했는데, 다행히 쓸모가 있었다.




입구에서 표를 구입할 수 있다. 매표 기계엔 한국어도 나와서 편리했다. 입장료는 한국 돈으로 1500원 정도였다. 무지 싸군.

입장료 TWD 40, 락커 이용비 TWD 20 (코인락커라 동전 필요)




노천탕이라 사진은 찍을 수 없고, 나중에 온천욕 끝나고 베이터우 도서관에서 기억을 더듬어 그림으로 그려봤다.

우선 입구에선 표와 수영복을 확인한다. 내 래쉬가드를 만져보곤 오케이를 외친 걸로 보아 수영복의 재질도 보는 듯 하다. 함께 쓰는 탕이니 아무래도 꼼꼼하게 검사하는 것 같다.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신발장이 있고, 샤워를 하고 나온 사람들을 위한 드라이어 (TWD 20) 기기가 설치되어 있다.

시설이 좋지는 않고, 우리나라 90년대의 여름철만 여는 야외 풀장 정도의 시설? 가격이 저렴하니 시설을 기대할 순 없다.

거기서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샤워실 (TWD 20) 과 코인락커 (TWD 20) 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동전으로 이용되니 동전을 몇 개 챙겨가야 할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전이 딱 20원 밖에 없어서 코인락커 이용하고 나니 나머지 시설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동전 바꾸는 기계도 찾아보면 어디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냉수로 대충 씻었다. 냉수 샤워는 공짜였다.

샤워실 맞은편은 온천탕이다. 맨 위는 43~45도, 그 아래는 40~43도, 그 아래는 35~40도다. 나는 맨 아랫탕도 뜨거워서 못 있겠더라.




노천탕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로 보이는 분들이 많았다. 관광지라서 여행자들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은 서양인들 2, 3명 정도? 나머지는 다들 동네 주민 같았다.

근데 이 동네 주민 분들, 역시 타이완 분들이라 무지 친절했다. 내가 맨 아랫탕을 못견뎌하며 나간 뒤 위쪽의 물에 몸을 담그려고 하자, 다들 기겁을 하며 손짓발짓으로 나를 말렸다. 맨 아랫탕도 못 견디는 애가 그 위쪽으로 가면 큰일 난단다.

이지 던전도 깨지 못했으니 노멀 던전 출입이 제한되는 건가... 내가 입을 삐쭉 내미니까 어떤 어르신이 맨 아랫탕의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안쪽은 그나마 괜찮단다. 반신반의하며 들어갔는데 안쪽은 진짜 덜 뜨겁더라. 같은 탕인데 온도 차이가 이렇게나 나다니. 노천탕이라 그런가. 내가 만족해하며 자리를 잡자 주변에 계신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

물이 그렇게 깨끗하진 않았다. 날파리나 나뭇잎, 흙들이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뭐, 노천탕에 공중탕이니까. 이보다 더 더러운 물에도 몸을 담가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네. 하여간 그렇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정신을 어딘가로 날리고 몸을 뎁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어떤 아저씨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안뇽하쎄오?" 내가 놀라서 바라보자 이어서 말했다. "여기 이쑨재 와쏘요. 한국 티비. 안뇽하쎄오?" 예상치 못한 한국말에 빵 터져버렸다.

아니, 싱위도 그렇고, 이 타이완엔 왜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야? 생계용 (싸다 싸, 내 친구, 서비스 이쏘요, 팁 마니 주세요, 이런 말들) 이 아니라 취미로 배우신 것 같은데 엄청 잘하잖아. 그 한국어 조금 아시는 아저씨 때문에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 통역이 생겼다! 어서 우리의 친절을 보여주러 가자! - 이 얘기, 저 얘기를 걸어왔고 - 그 대부분이 타이베이에서 갈만한 곳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 나는 지금 내게 흐르는 땀이 온천 때문인지 아니면 몰려든 사람들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진땀을 빼다가 탕에서 나왔다.





5.

온천욕을 끝내고 내리막길을 따라 베이터우 도서관으로 향했다. 왠지 나에게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 같다. 나른하군.

베이터우 도서관은 녹음 짙은 공원에 위치해 있어서, 걸어가는 동안 한결 상쾌해졌다. 그 상쾌함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보통 도서관에 가면 책 냄새로 차있는데, 이곳 베이터우 도서관은 나무 냄새가 책 냄새를 압도하고 있었다. 건물 전반이 목재다보니 풍기는 나무 내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만화 속에 나오는, 토토로가 살고 있는 듯한, 몇 천 년 된 나무 한가운데의 뻥 뚫린 공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게다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로서의 도서관이 아니라, 진짜 주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으로서의 도서관이었다. 편한 옷차림으로 책을 읽는 사람, 영어 노트를 펼쳐놓고 옆사람과 함께 공부 하는 사람, 한쪽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한권씩 독파해나가는 사람,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내어 읽던 책의 구절을 따라 적는 사람... 이곳은 진짜 도서관이었다.

그러고보니 토론토 노스욕 도서관엘 처음 갔을 때, 딱 이 기분이었다. 외국의 도서관에 이방인으로써 방문했을 때, 무언가를 쌓아가려는 사람들이 만든 고요한 분위기를 제 3자로써 멀찌감치서 바라볼 때 느끼는, 어떤 생소함과 생경함이 있는데, 이곳에서 느꼈던 것도 그것이었다. (이 기분은 한국의 도서관에선 못 느낀다. 왜냐면 한국의 도서관은 처음부터 내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나의 도서관이니까!)




지금의 나는 도서관 이용객이 아닌 관광객으로 왔기에 책장을 건너뛰고 테라스로 나왔다.




테라스에서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봤다. 온천수 계곡을 따라 조성된 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 자체도 그렇지만, 건물에서 바라보는 뷰 역시 친환경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녹색 뷰다.




마침 테라스의 테이블 하나가 비어있길래, 자리에 앉아 일기를 썼다. 핸드폰 메모장을 이용해도 되지만, 역시 이런 곳에선 노트와 펜을 사용하고 싶다. 핸드폰으로 뭔가를 끄적이는 게 그다지 낭만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나는 옛날 사람일까?

간간히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는 동안 이 낯선 도서관은 점점 나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과분할 정도로 행복했다. 내 행복은 목욕탕, 도서관, 노트, 펜에서 오는구나. 나도 참 소박한 사람이다.





6.

도서관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는데, 신베이터우 역 근처에 뭔가 일일 마켓이 열린 게 눈에 띄였다.





이곳엔 어렸을 때 자주갔던 홍대 프리마켓처럼, 아기자기한 소품과 수공예품이 가득했다.

여행자 모드에서 쇼핑 모드로 바뀌어 이것저것 많이 구입하고 싶었으나, 현금이 부족했다. 청주 공항에서 한화를 미국 달러로 바꾸기만 하고 정작 여기 와선 타이완 달러로 바꾸는 걸 까먹어서... 돈... 돈이 없다...





그냥 실컷 구경하기로 했다. 그래서 구경만 했다. 사실 이런 곳은 둘러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7.

노상 마켓의 부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둘러보고 있는데 (그러다가 진짜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미달러로 흥정이라도 해보려고) 웨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웨이 : 베이터우는 어때? 재밌어?

베이터우는 완전 내 취향이다. 온천도 즐기고, 평화로운 풍경도 있고, 도서관도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도 팔고. 너무 마음에 든다고, 베이터우에 오길 잘했다고 이야길 하면서 이제 점심을 먹고, 단수이로 넘어갈 준비를 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자 웨이는 퍼뜩 생각난 듯,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웨이 : 내 기억에 의하면 베이터우에는 올드 마켓이 있어.

올드 마켓이 있다고?

내가 의아해하자, 웨이는 내게 그 '베이터우 올드 마켓'이란 곳의 주소를 찍어줬다. 그러더니 그곳에서 점심을 사먹으면 재밌을 거라는 것이었다. 나는 요 근처 가이드북에 나온 라멘집엘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올드 마켓'이라는 곳을 알려주고 좌표까지 찍어주면... 그렇다면 나는...

Challenge Accepted!

갈 수 밖에 없다!




Beitou Market (No. 30號, Xinshi Street, Beitou District, Taipei City)

https://goo.gl/maps/vYgxtSFZAf9xh1BF6


웨이가 찍어준 '베이터우 올드 마켓'이란 곳은, 신베이터우 역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에 위치한 곳이었다. 지열곡을 비롯한 관광지들은 신베이터우 역에서 동쪽에 위치해있으니, 남쪽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정말 배가 고팠고 라멘이 고팠으나... 웨이만 믿고 가봤다. 웨이라면 신뢰할 수 있지!




가는 길에 소방서를 하나 지난다. 소방서가 보이면 반쯤 온 거다.




오! 뭔가 재래시장 같은 느낌이 난다! 여긴가 보다!




그래, 이곳에서 뭔가를 먹는 거야!




...라고 호기롭게 들어간 것치곤...

인파에 휩쓸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지 뭔가 먹기엔 넘나 정신이 없는 공간이었다.

일단 사람이 무지 많고, 들려오는 말은 중국어 (타이완어?) 뿐이며, 써있는 말도 한문 뿐이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이 가득했고, 갑자기 오토바이가 출현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아니 그 전에, 그래, 일단 사람이 무지 많았다! 나는 인파에 쓸려다니며 아니 이게 뭐여, 나는 그저 온천 힐링을 끝내고 편안하게 점심을 먹고픈 건데 뭐가 이렇게 하드해, 이 난이도는 대체 뭐야! 라고 속으로 외쳤다.

웨이... 그는 내 여행 레벨을 넘나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닐까...?

나 중국어 말 못하는 거 알면서... 내 이 자식을...!




그러다가 이건 나라도 알 수 있겠다 싶은, 저레벨의 음식이 등장했다.

초밥! 길거리 초밥이었다. 초밥은 한국에서도 아주 좋아라 하고, 나 자신도 한 때 스시라고 불렸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거라면 괜찮다 싶었다. 초밥! 그래, 초밥을 먹자!

사람들이 어떻게 먹나 살펴보니, 그냥 플라스틱 용기를 하나 집어들어 스시를 주워담은 뒤 계산을 하고 있었다. 좋아! 나도 동참하겠어! 초밥에 정신이 팔려 잘 안껴주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플라스틱 용기를 왼손에 장착 후 오른손으론 먹고 싶은 초밥들을 하나씩 주워담았다. 근데 이거 크기가 왜 이렇게 커? 몇 개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 적당히 고르고 빠졌다.

직원에게 가져다주자, 직원이 뭐라뭐라 묻는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헤 하고 웃으니, 직원이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아차린 듯 멋쩍게 웃으며 생강과 간장 등을 보여줬다. 나는 간장만 달라고 했다.




날치알 초밥, 콘샐러드 초밥, 장어 초밥, 롤 등등. 사진으론 내 두꺼운 허벅지 위에 두고 찍어서 그 크기가 느껴지지 않겠지만 실제론 크기가 무지 커서 (거의 수제 유부 초밥 수준의 크기였다) 5개만 골랐는데도 배가 무지 불렀다. 장어 초밥이 제법 선전했던 것으로 기억함.

여기에 적당한 음료수집에서 윈터 멜론 (동과) 쥬스를 시켜 함께 먹었다.

가격은 스시 5개에 TWD 50, 음료 TWD 30.

도합 TWD 80(한국 돈으로 3천원)의 점심이었다.

흥... 가격 대비 몹시 훌륭한 점심이었다. 역시 재래시장은 최고다. 아까는 욕해서 미안하다, 웨이.

양반은 못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웨이에게서 잘 찾아갔냐는 메시지가 왔다. 나는 초밥을 맛있게 먹었다고 답했다. 웨이는 "초밥? 초밥이라고? 거기 초밥을 팔어? 시장에서 초밥을 사먹었어?"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더니, 잠시 후 여튼 잘 먹었으니 됐다는 느낌의 답을 보냈다.

행간에서 '아니 왜 그런 음식을 먹었...?' 스러운 당혹함이 느껴지는데... 다른 음식을 먹었어야 했나?

하지만 나는 타이완 음식을 여전히 잘 모른다고!




그 잘 모르는 타이완 음식을 잔뜩 먹게 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덧글

  • 존평씨 2019/06/02 22:27 # 답글

    대만을 간다면 저 도서관은 한번 찾아가보고 싶네요.
    저 분위기는 직접 느껴보고 싶은데요.
    가려면 10년은 있어야될 것 같지만...

    위유런은 처음 듣는데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앞에 아예 관용어처럼 수식이 붙는 사람이라니 꼭 고대 로마의 정치가 같은 느낌인데요.
    enat님을 예로 들자면 '파워블로거라고 말하면 화를 내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enat' 같은 걸까나. ㅎㅎㅎ
  • enat 2019/06/16 14:50 #

    돈 많이 벌면 저런 도서관 짓고 싶어요 ㅠㅠ
    도서관 이름엔 제 이름을 넣을 거에요 'enat의 친환경 도서관' 요러케
    대만에 안가셔도 느끼실 수 있게 제가 하나 지어드릴게유
    그러려면 20년은 있어야... 아? 대만에 가시는 게 더 빠르실 듯...

    저도 저기 가서 위유런이란 사람에 대해 처음 알게 됐어요... 근데 저 수식어는 대체 뭐죠!? 저랑은 전혀 다른 내용이네요! '덧글로 그릇된 정보를 생산하여 제 노트북 모니터에 자꾸 음료를 뿜게 하는' 존평씨님!
  • 우레 2019/06/04 12:51 # 삭제 답글

    이낫님 베트남글을 보고 다낭에 가기로 마음먹고, 내쳐서 아예 지난 2월에 베트남 남부 순회하였었는데, 이번엔 대만이네요. 7월말에 갑니다. 베이터우는 여정에 없었는데 마음이 바뀌네요. 타이동 대신 이곳으로 급거 일정 수정하였습니다. 맛갈스런 이낫님 맛난 식도락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enat 2019/06/16 14:54 #

    오잇!? 그 뭔가 많이 영광입니다! 누군가의 여행 일정에 영향을 끼치다니... 근데 7월 말이면 무지무지 덥지 않을까요!?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온천마을 베이터우가 그 시기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타이동이 나으실 수도 ㅠㅠ... 베이터우는 타이베이 잠깐 체류하실때 다녀오실 수 있을 만큼 타이베이 시내와 가까워서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다음 여행기를 부지런히 올려볼게요!
  • 이글루스 알리미 2019/06/10 08:08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6월 10일 줌(http://zum.com) 메인의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여행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enat 2019/06/16 14:54 #

    감사합미당
  • kanei 2019/06/28 02:10 # 답글

    대만사람들 정말 좋죠... 너무 친절하고 성격도 좋고... 몇년전에 갔지만 기억에 남았어요. 일본도 친절하긴 한데 뭔가 가식적인 벽하나 친듯한 친절함인 것에 비해 그냥 순수한 친절함의 느낌이 있어서 대만을 좋아해요. 그때 외국인처럼 한국, 일본, 대만 갔는데 한국이랑 일본에선 지하철 자리양보 아무도 안하는데 대만에선 하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흐뭇했던 기억이 있어요. 또 가고 싶은 곳이에요. (음식도 맛있고)

  • enat 2019/07/12 23:07 #

    저도 대만 좋아합니다 ㅠㅠ 대만 사람들 좋아해요 ㅠㅠㅠㅠ 말씀하신 순수한 친절함이란 단어가 딱 맞는 것 같아요. 예전에 대만 친구가 "사람들을 돕는 건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야~" 어쩌구 이야기를 해서 감동한 적이 있었어요 ㅠㅠ 언제가도 좋은 곳 같아요 대만은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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