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1 20:58

대전, 반나절 ├ 중부지방

1.

회사일로 대전에 잠시 내려갔다.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점심 시간이 지난 어중띤 오후. 복귀해도 퇴근 시간이 넘을 것 같아 좀 쉬다가 가기로 했다.

전날 저녁, 자전거를 빌려 열심히 바퀴를 굴린 탓에 무릎과 허벅지가 쑤셨다. 이럴 땐 마사지나 찜질, 혹은 온천의 뜨뜻한 물이 필요하다. 그러고보니 요 근방에 유성 온천이 있었는데. 마사지나 찜질은 인천에서도 할 수 있으니 온천엘 가자.

택시를 잡아타고 제일 유명하다는 유성호텔 대온천장에 갔다.







온천 목욕탕 가격은 9천원. 평일 낮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르신들이 꽤 계셨다. 젊은 처자가 이 더위, 이 시간대에 어쩐 일인가 하는 느낌이었다. 괜찮다. 배경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는 일은 익숙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옷을 홀딱 벗고 샤워를 한 뒤 탕에 들어갔다.

뭉친 근육들이 환호한다. 살 것 같다.







유성호텔 대온천장은 100년 된 온천이라고 한다. 100살인 것치곤 바나나맛 우유를 좋아하는 듯. 귀여운 포토 포인트에 실소했다.

시설은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깜찍하나 낡았다. 사실 입장료 9천원에 요 시설 정도의 목욕탕이 우리 동네에 있다면 그닥 안 올 것 같긴 하다.

그러나 효능이 있을 것 같은 온천물 + 낯선 타지역 + 업무 처리 후 해방감 덕분에 만족감은 아슬아슬 세이프. 좋았다.





2.

목욕을 마치고 위로 올라가려다가 근처에 예쁜 카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기까지 슬슬 걸어갔다. 거리는 1km 정도. 택시 타면 금방이지만 점심 먹은 게 얹힌 것 같아 걸으며 소화시키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를 보며 카페로 가는 길. '온천마을 도서관'이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온천마을 도서관? 어쩜 이리 예쁜 이름이... 급 타이완에서 봤던 베이터우 도서관이 떠올랐다. 고무되어 길을 살짝 돌아 거길 가봤다.

그리고 찾아간 그 자리엔... 이런 건물이 있었다.




유 성 문 화 원

...뭐야? 온천마을 도서관은 어디에?

이 위치가 아닌가? 아니면 사라졌나? 고개를 갸웃하며 나오는데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다 내게 길을 물었다.

아저씨 : 학생, 여기 온천마을 도서관이 있는가?
나 : 저도 그걸 알고 싶어요.

나 말고 그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있다니! 유명하고 대단한 도서관이긴 한가보다.

나는 온천마을 도서관의 위치가 지도상으로는 저 유성문화원인데, 1층 들어가서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음을 털어놓았다. 아저씨는 자기도 둘러보겠다고 했고, 나도 궁금해져서 다시 한번 가보겠다고 했다.

아저씨와 함께 1층 사무실을 지나, 복도를 꺾고, 자료문화원을 지나자, 철문에 작게 '온천마을 도서관'이란 문패가 새겨진 모습이 보였다.

나 : 바로 여긴가봐요!
아저씨 : 오오! 그래! 찾았다!

우리는 고무되어 도서관 문을 열었다.





나 : ...
아저씨 : 오! 책이 제법 있군!
나 : ......
아저씨 : 이 정도면 훌륭한 걸!

온천마을 도서관은 그냥 지역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있을 법한 그런 느낌의... 베이터우 도서관을 떠올린 내가 나빴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좀 더 도서관에 많은 것을 지원해주고 투자해줬으면 좋겠다.

실망한 날 두고, 아저씨가 싱글벙글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연신 훌륭하다, 괜찮다는 말을 하며. 이 아저씨는 뭐가 이렇게 긍정적이야? 나는 본받아야겠다 생각하며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저씨는...

아저씨 :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도서관 선생님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면서 뭔가 카탈로그 같은 걸 꺼낸다.

...영업사원이었어!?

사서들은 무지 귀찮은 표정이었으나 아저씨는 개의치 않고 영업을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판매의 장에 당황한 나는 쭈뼛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근데 도서관 사서들의 눈엔, 아저씨와 함께 들어온 나도 영업사원처럼 보였나 보다. 그들의 눈이 따가웠다. 나는 저 사람과 관련이 없음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싱긋 웃었지만 분위기는 더 영업스러워졌다. 마치 내가 바람잡이 같잖아.

이 이상의 분위기를 버틸 수가 없다. 나는 몸을 돌려 도망갔다. 화이팅, 아저씨.





3.

온천마을 도서관에서 나와 강변을 좀 걸었다.





날씨 좋군.

어떤 외국인 두 명이 길을 잘 모르겠다며 자전거를 타고 헤매는 모습을 봤다. 도와줄까 했지만 다시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사라져버려서 기회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겠으나 헤매지 않고 도달하길.

10분 정도 걸어서 그 이쁘다는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이름은 인터뷰.

가게 외관이 이쁘긴 했다. 벽돌 외벽에 대형 창문, 늘어진 커텐과 특이한 좌석.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모습이 예쁜 카페였다.





메뉴는 평범한 축이었다. 커피, 차, 쥬스 등등이 있었고, 마들렌이나 스콘 등을 곁들일 수 있었다.

커피에 무게를 두고 파는 것 같았으나 오늘 미팅을 위해 커피를 이미 4잔 이상 마셔버려서 오늘 밤에 잠이 올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차를 시켰다. 과일 티였는데, 밍숭맹숭하니 좀 아쉬웠다. 차를 뜨거운 물로 충분히 우린 다음에 얼음을 넣어줬으면 좋았을텐데. 디테일이 부족하다.

가격은 5500원. 자리값으론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한 가격이었다. 역시 커피를 마실 걸 그랬나?






카페가 워낙 예뻐서 그런지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일 낮에도 이리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면 주말엔 어떨까. 허허.

어쨌든 자리 하나 잡고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서류 좀 정리하다가 역으로 돌아갔다.





4.

역으로 가는 택시의 기사님은 왜곡된 역사관을 강요하시는 분이셨고 나는 몹시 피곤했으나 영혼없이 아하~ 허어~ 저런~ 등등의 추임새를 넣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요새 영혼없이 경청하는 게 버릇이 되서 어렵진 않았다.

근데 택시 아저씨가 자기 이야기 재밌게 들어줘서 고맙다고 택시비 깎아줬다. 내 평생 한국에서 택시비 DC는 처음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5.

기차를 타기 전, 역 앞 중앙시장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길래 찾아갔다. 백종원의 3대 천왕에도 나왔다고 한다. 이름은 개천식당.





시장 내의 먹거리 골목과는 조금 떨어져있어서 처음엔 여기가 맞나 했다. 그냥 네이버 지도에 개천식당이라고 쳐서 나온 그 위치로 가면 된다. 먹거리 일대와 떨어져있다고 쫄지 말지어다.





가게 간판 아래, 요 표지판을 따라가면 됨. 그럼 무지 오래되고 유서깊은 건물이 나온다.

솔직히 위생을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한숨 쉴 수도 있을 만한 환경이다. 그러나 원래 역사가 오랜 집은 이런 것이다. 맛만 있다면 상관없지 주의인 나는 개의치 않고 들어갔다.





요건 메뉴.

서빙하는 아주머니께선 시장 상인답게 매우 쾌활하고 발랄하셨다. 기분 좋게 만두국을 시켰다.





엄청 빨리 나왔다. 미리 셋팅 해놓고 육수 부어서 바로 나오는 듯.

맛은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만두국 맛이었다. 사실 아주 맛있는 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할머니가 떠올라서... 추억에 젖을 만한 맛이었다.

그렇게 짜지도 않았고 그래서 질리지도 않았다. 양이 꽤 많았는데도 입 짧은 내가 저걸 다 해치운 걸 보면 사람을 끄는 맛이 있긴 한 것 같다.

아, 김치 맛있었음. 특히 열무김치 국물...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먹던 진한 유산균의 맛이었다.

으으. 배부르다.





6.

저녁이 되어 슬슬 인천으로 올라가려는데, 역에 가서 광명 가는 표를 사려니 밤 9시까지 전석 매진 입석도 매진이란다. 우째서!?

금요일이라 그렇단다. 금요일에 ktx 표를 끊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줄 정말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예매할 걸 그랬다.

눈을 꿈뻑이며 어쩌나 생각하고 있는데 대표님께 전화가 걸려와서 일처리 한 거 보고했다. (반나절 동안 놀러 돌아다닌 건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슬쩍 기차가 없어서 늦게 올라갈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표님은 그게 뭐 큰일이냐며 3분 만에 10분 뒤에 출발하는 티켓 취소표를 구해주셨다. 뭐야! 대단해! 게다가 특석! 자리 넓어! 공짜 간식이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앞으론 뒤에서 궁시렁거리지 않기로 다짐 또 다짐했다.





7.

지금은 광명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이다. 습관처럼 텀블러 안에 든 커피를 홀짝였는데 그 때문인지 화장실에 무지 가고 싶다.

그 가고 싶은 생각을 잊기 위해 포스팅을 시작했는데 벌써 끝나버렸다.

오늘 중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고비인 것 같다.

여튼 즐거운... 즐거운 대전 반나절 나들이였다.







덧글

  • 에스j 2019/06/21 23:38 # 답글

    와우. 어딜 가나 환상적으로 즐기시는군요. :) 대전은 금요일 오후4시 즈음부터 서울로 귀환하는 사람들로 꽉 찹니다; 적어도 연구소들은 주차장부터 텅텅 비더라고요. 옛날에 실험하러 대전다니면서 중간에 유성온천도 가기도 했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 enat 2019/06/22 17:03 #

    대전에 연구소가 많아서 유독 그렇군요! 금요일>평일>사람이없을것이다 하고 방심한 제 잘못이었어요 ㅋㅋㅋ
    사실 별로 논 건 없지만 일하는 짬짬이 놀았더니 재미가 배로 증가하는 마법이...!
    에스j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 라비안로즈 2019/06/22 00:31 # 답글

    우와.... 대표님 짱이시네용... ㅎㅎㅎ 그나저나 취소표를 어찌 구하셨대요.. 능력자이십니다.
  • enat 2019/06/22 17:04 #

    아마... 코레일 앱에서 새로고침하시며 얻으신...!
    지방출장을 자주 다니셨던 경험으로 구하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제겐 아직 없는 능력이죠...
  • 존평씨 2019/06/22 00:45 # 답글

    힘내!!! enat님의 방광아!
    넌 더 커질 수 있어!!!
  • enat 2019/06/22 17:04 #

    ㅋㅋㅋㅋ 제 방광을 응원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절 응원하는 걸로 충분하잖아요!!!
  • 존평씨 2019/06/22 13:27 # 답글

    뭔가 기시감이 들어서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고독한 미식가>랑 느낌이 비슷해요.
    여행을 즐기는 어느 회사원이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비는 시간에 잠깐의 여행을 즐긴다는 거잖아요?
    앞으로의 연재 컨셉은 <고독한 여행자>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
  • enat 2019/06/22 17:07 #

    음!?
    생각해보니 그런...!?
    예전에 인상깊게 봤는지라 그 느낌이 들어갔을 수도요!?
    하지만 제가 출장이 잦은 편은 아니여서 연재까지 할 정도의 경험이 쌓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고로씨처럼 많이 먹지도 못하고요! 헤헷!
  • Tabipero 2019/06/22 13:38 # 답글

    오오 유성 언저리 즐기는 방법 잘 봤습니다. 최근에는 맨날 토요코인에 자러만 간 것 같은데...
    인터뷰 카페는 메모해 놓겠습니다 ㅋㅋ
  • enat 2019/06/22 17:09 #

    아니 이 짧은 덧글에 제게 가장 필요한 정보가 ㅋㅋㅋㅋ
    사실 다음달에 대전 출장이 며칠 잡혀있거든요! 그 땐 토요코인을 잡아야겠군요!!!! 토요코인 카드 만들어놓고 쓰질 않아서 아까워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당!!!
  • Tabipero 2019/06/22 19:33 #

    회사에서 숙박비 정산이 어떤식으로 되는진 모르겠지만 대전 토요코인은 모텔보다 더 싼 가격의 방부터 토요코인치고는 좀 비싼게 아닌가 싶은 (비교적)고오급 객실도 있으니 골라잡으면 될것같습니다.
  • enat 2019/06/23 13:02 #

    넹 ㅋㅋㅋ 지금 객실 좀 둘러보고 정해봐야겠오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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