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 12:56

타이베이 주말여행 (4) 단수이 둘러보기 ├ 타이베이 주말여행 (2019)

1.

전 포스팅과 이번 포스팅에서 둘러본 곳들을 지도에 표시했다. 방향 참고만 하세용.




웨이가 말한 '관광객들이 자주 간다는 요새'의 이름은 '홍마오청'이었다. 아까 아게이를 먹은 곳에서 더 가까우니, 우리처럼 갈팡질팡하지 않고 동선을 잘 짜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내키는대로 돌아다닌 터라 갈지자를 몇 번 그렸다.

웨이 : 효율이 떨어지는걸.
나 : 언제는 우리가 효율을 따져가며 놀았나.





라오제에서 지도로 갈 방향을 확인한 뒤 그쪽으로 걷다가, 빨간 벽돌로 지어진 교회를 마주했다.

교회? 대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종교 건축물인 것 같은데. 찾아보니 대만 최초의 교회라고 했다. 역시 항구쪽에 위치한 마을이다보니 외래 종교 사원도 제일 먼저 세워지고 그랬던 것 같다. 인천에도 그런 성당이 하나 있지.

나 : 웨이, 그러고보니 네 종교는 뭐야?
웨이 : 나? 나는 나 자신을 믿지.


그러면서 잘난 듯한 포즈를 취하는 웨이였다. 대단하네. 나는 다른 건 다 믿겠어도 나 자신은 못 믿겠던데.




교회 근처에는 자리를 깔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가 있었다. 잘 모르는 중화권 음악이었는데, 바이올린 선율이 몹시 아름다웠고, 덕분에 요 일대 분위기는 매우 평온했다.

잠시 연주를 구경하며 쉬다가, 웨이의 보챔을 받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2.

요새는 단수이 라오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덥고 습한 타이완에서 15분 동안 걷는다는 건, 그것도 배부른 채로 걷는다는 건, 그냥 녹초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건물 용도답게 단수이 일대가 한눈에 바라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기에, 우리는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사실 그렇게 급경사거나 높은 언덕은 아닌데, 그냥 우리가 좀 지쳐있었던 것 같다.

나 : 조금만... 쉬자...
웨이 : 좋은... 생각이야...


요새 앞의 벤치에 앉아 모기에게 헌혈하며 잠시 쉬었다. 언덕 위라서 바람은 시원했다.





입장료는 80TWD.

요새의 이름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홍마오청'. 타이완 사람들이 여길 점령했던 네덜란드인들의 붉은 머리를 보고 홍 마오(紅毛)라 불렀는데, 거기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 요새를 처음 지은 건 스페인이었는데, 그 이후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열강들의 기지로 거듭 사용됐다고 한다. 웨이가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나라랑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나 : 아름다운데 아름다운 역사를 가진 곳은 아니네.
웨이 : 한국이랑 비슷하지?


웨이는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리적 이점 때문에 강대국의 침략과 피지배를 받아온 역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씁쓸하게 웃으며 요새를 둘러보았다. 요새 안쪽엔 전시관과 뷰포인트 등이 있었다.





요새 옆에는 영국 영사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남아있다. 붉은 벽돌 외벽에 아치형 복도로 꾸며진, 전형적인 식민지풍 양식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위치할 뿐더러 보존상태가 훌륭하여, 여기서 인생샷을 많이 건져간다고들 한다. 과연 관광객들이 차려입은 채로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고 있었다.

웨이 : 어? 너 친구들 많다. 너도 사진 찍어줘?
나 : 아니, 땀투성이고. 됐어.


아까 오전에 베이터우 온천을 즐긴 이후로 거울을 보질 않아서 사진을 찍어도 별로일 것 같았다. 머리도 엉망일 것 같고, 화장도 지워진 것 같고, 옷도 별로인 것 같다. 차라리 다음에 예쁘게 차려입고 다시 오는 쪽이 낫겠어.

나 : 근데 내 친구들이라니?
웨이 : 몰랐어? 다들 한국 사람이잖아.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사진을 찍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 웨이 왈, 한국인 여행객들은 옷입는 거랑 화장법이 타이완인들과 많이 달라서 (과하지 않고 세련됐다고 한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이제는 하도 많이 봐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랑 아무리 섞여있어도 한국인만큼은 찾아낼 수 있는 센서가 생겨났다고.

나 : 그럼 나도? 나도 한국인인줄 딱 알겠어?
웨이 : 너, 너? 너는... 음... 흠...


뭐지!? 왜 말을 못해!? 어서 과하지 않고 세련됐다고 말해!





결국 대답을 못 듣고 내부로 들어왔다. 왠지 열받는다.

내부에는 당시 모습을 재현한 방들이 있다. 삐걱이는 계단과 복도를 왔다갔다하며 응접실, 식당, 집무실, 회의실 등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어색하지 않았다. 관리가 잘 되는 모양이다. 입장료값을 하는군.




쪽지를 남기는 방도 있길래 몇 글자 적어놓고 왔다. 웨이가 뭐라고 썼냐고 물어봤는데 대답하기 귀찮아서 별 말 안했더니, 자기 욕을 쓴 거 아니냐며 추궁했다.

도대체 네 안의 나는 얼마나 문제아인거냐.





3.

홍마오청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진리대학(구 옥스포드 칼리지)이다. 타이완에 처음으로 지어진 서양식 학교라고 한다.




진리대학 내에 있던 예배당.

이 건물 주변에 정원과 연못이 있고, 옥스포드 칼리지 시절의 작은 건물도 남아있고, 뭐 그렇긴 한데 사진이 예쁘게 나온 게 없어서 올릴 게 없다. 아마도 웨이랑 뭔가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사진을 제대로 못 남긴 것 같다. 무슨 이야기였지? 또 쓸데없는 이야기겠지.





여긴 진리대학 정문 맞은편 부속건물에 위치한 카페다.

꽤 예쁘장한 카페여서, 아마 혼자였다면 분명 뭔가를 사먹었을 거다. 하지만 웨이는 '예쁜 카페에서 비싼 돈을 주고 음료를 사먹는 행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쪽인 것 같아, 굳이 들어가진 않고 사진만 찍고 지나갔다. 돈 아끼고 잘됐지, 뭐.





카페를 지나 모퉁이를 꺾으면 잘 관리된 정원과 작은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걷다보면 요래 예쁜 부속건물이 줄줄이 나온다. 진리 대학을 세운 선교사가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어떤 건물은 빨간 벽돌 건물이었고, 또 어떤 건물은 우아한 흰색 건물이었는데, 어떤 건물이든 주변 정원과 어우러진 모양새여서 어색함이 없었다.

사실 쭉 둘러보며 생각한 건, 데이트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거였다. 지난 번 다낭에 갔을 때 들렀던 호이안도 그랬지만, 이곳도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면 참 좋겠구나 싶었다. 이 세상엔 사랑하기에 좋은 곳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그렇게 감상에 젖어 홀로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웨이는 어디로 간 거야?




웨이 : 야옹.
웨이 : 니야아아옹.


웨이는 계단에 앉아 몸을 낮추고 고양이와 교감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웨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귀찮은 듯 몸을 일으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웨이는 아쉬워하며 몸을 돌리다가 내 맹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웨이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웨이 :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거든.
나 : ......
웨이 : 나는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그리고 고양이어를 할 줄 알아. 4개 국어 통역이 가능한...


지어내지마!





4.

진리대학에서 길을 따라 바다가 보이는 부둣가로 내려왔다. 해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웨이는 버스를 타고 역까지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내게 물었지만, 나는 반짝거리는 부둣가를 거닐고 싶은 마음에 걸어가자고 했다. 웨이는 어쩐지 포기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어라? 많이 피곤한 건가?

나 : 웨이, 피곤해?
웨이 : 그럴리가! 난 네가 피곤할까봐 그런 거야.
나 : 나는 괜찮은데. 걸을만해.
웨이 : 물론 나도 그래.


그래? 그렇다면 사양 않고.




우리는 불이 켜진 가로등 아래, 부둣가를 따라 걸었다.

어쩐지 범죄와 약탈, 배신과 암투가 가득했을 것만 같은 - 근대풍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인가!? 그치만 시대가 시대였으니 정말 그랬을 것 같다 - 이 거리는, 지금은 많은 카페와 음식점, 공방들로 가득하다. 음음, 평화로운 시대다.








지친 웨이 - 웨이는 눈과 다리가 풀려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뿐이지 분명 무진장 지쳐있었다 - 와 함께 걷는 동안, 바다를 마주하고 지어진 크고 작은 점포들을 보았다.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조명 불빛, 음악 소리, 사람들의 담소, 공방 작업의 열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단수이의 진면목은 여기에 있었다. 저 언덕 위의 식민지풍 낡은 건물들도, 골목 안쪽의 라오제와 해안공원의 먹거리 노점들도, 이 대학가 근처 부둣가에 조성된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라가진 못할 것이다. 10년 전 홍대 뒷골목과 한강 공원의 분위기를 합쳐놓은 것 같다하면 좀 비슷할까.

나는 신이 나서 깡총거리며 걷다가, 바다 쪽에 배가 떠가는 것을 보고 웨이에게 물었다.

나 :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거야?
웨이 : 맞은편의 바리(Bali)로 가는 거야.
나 : 뭐!? 파리(Paris)!? 낭만적이야!
웨이 : 아니, Bali라고.


이미 흥겨울 대로 흥겨워진 나는 웨이의 말을 막고 샹젤리제를 부르기 시작했고, 웨이는 술도 안마셨는데 주정을 부리는 친구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고심하는 듯 하다가 자기도 그냥 샹젤리제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샹젤리제 소녀의 여행기는 라오허제 야시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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