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4 00:17

타이베이 주말여행 (6) 핑시선 반짝 여행 └ 타이베이 주말여행 (2019)

1.

다음날, 타이베이 이틀째.

저녁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대학원만 아니었어도 3일은 있는 건데 그 놈의 수업 때문에 이틀 밖에 짬을 못내다니 뭔가 열받는다. 왜 공부를 하기 시작했냐부터 거슬러 올라가다가 왜 태어났냐까지 도달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뻘 생각 말고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겠다.

침대에 누워 비행기 타기 전까지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핑시선 여행을 반짝 떠나기로 했다.




핑시선은 타이베이 동쪽의 시골 지역 노선이다. 일제시대에 탄광과의 연결을 위해 개통된 노선이며, 단선에 3량짜리 디젤차가 다닌다. 예전에 타이중에서 탔던 지지셴(http://enatubosi.egloos.com/1925657)과 비슷한 것 같다.

지지셴도 끝부분(지지~처청 라인)은 사람 참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핑시선은 거의 전 노선에 걸쳐 사람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도라고 했다. 사람 많은 건 싫은데. 예전에 리스본에서 28번 트램을 탔던 (http://enatubosi.egloos.com/1906572) 기억이 떠올랐다. 으으. 그거 정말 싫은데. 

한 가지 기대를 품는 건 지금이 월요일이라는 것, 그래서 주말보단 사람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요일의 힘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핑시선에서 어느 역에 정차할지는 가는 길에 정해야겠다. 일단 아침을 먹으며 멍한 머리를 깨우자.





2.

호스텔에서 조식을 때우고,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기념품을 잔뜩 구입한 뒤 - 쇼핑할 시간이 없는 단기 여행 중엔 숙소 근처의 편의점이나 리테일 샵에서 쇼핑 욕구를 푼다. 대형 할인마트에 비해 비싸고 품목이 적어도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어서 곧잘 그런다 - 타이베이 중앙역으로 향했다.

아래에 핑시선을 어떻게 다녔는지에 대해 시간 순서대로 요약했다. 계획을 짜서 돌아다닌 건 아니고, 내 변덕에 따라 움직인 스케줄이다. 열차 시간이야 조금씩 계속 변할테고, 여행 스케줄 역시 개인마다 천차만별일테니, 이 즉흥적 스케줄은 그냥 참고만 하시길 바란다.



[2019년 4월 어느날의 핑시선 여행]


* 여행자 상태 : 저녁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해서 시간이 얼마 없었음, 사람 많은 곳 별로 안 좋아함.





1) 10:14AM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 출발

2) 11시 조금 넘어서 루이팡 도착, 보통은 루이팡에 내려서 핑시선 라인으로 갈아탄다고 한다. 근데 내가 탄 열차가 허우통까지 들렀다가 다른 라인으로 빠진다길래 그냥 허우통까지 가서 추가요금 냈다.

3) 허우통 : 일명 고양이 마을. 마을에 사는 고양이들을 잔뜩 볼 수 있다.

4) 12시 허우통 출발 ~ 1시 핑시 도착. (보통은 허우통~핑시 사이에 있는 스펀 역을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스펀 라오제, 스펀 폭포 등이 있어, 핑시선에 있는 많은 역들 중 볼거리가 제일 많다고.)

5) 핑시 : 스펀을 떠나 도착한 쪼매난 마을 핑시.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어서 다 둘러본 뒤에도 다음 열차 시간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았다. 남는 시간 동안 죽통에 글자 쓰면서 열차를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이 핑시선 여행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듯.

6) 1시 50분 핑시 출발 ~ 1시 55분 징통 도착. (기차로 5분 거리인데 1시간 동안 열차를 기다렸다 타다니!)

7) 징통 : 핑시선의 종착역. 핑시에서 구입한 죽통을 매달고, 아이스 커피 한 잔 마신 뒤 다시 열차 탑승.

8) 2시 12분 징통 출발, 이후 루이팡 거쳐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으로 돌아옴. 숙소에서 짐을 찾아 공항으로 ㄱㄱ!





3.

그럼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써본다... 차근차근이라고는 했지만 후딱 쓰고 잠들고 싶다. 그러니 최대한 호흡을 빨리 해서 (이 말은 도통 지켜지질 않는 것 같으나) 써보겠다.




타이베이 중앙역!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목 뒤는 따가웠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거나 조금만 더 대충 씻었거나 조금만 더 빨리 아침을 먹었거나 조금만 더 급하게 짐을 쌌거나 기념품 구입을 서둘렀거나 신용카드 결제 문제가 없었더라면, 더 빨리 열차에 탑승하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개 덜 보더라도 느긋하게 움직이는 게 취향인지라 그리 했다.

(만약 아침 일찍 움직이신다면 제가 포스팅한 것보다 더 많은 걸 보실 수 있으실테니, 취향껏 시간 분배를 하시면 될 것 같다.)




나름 열차 여행이니 편의점에서 간식을 좀 샀다. 지하철(MRT)에선 물 한모금도 마실 수 없는 것에 비해, 기차에선 음식 섭취가 가능하다고 했다. 기차에서 먹기 위해 샌드위치랑 밀크티, 초콜릿 몇 개를 샀다.

루이팡으로 가는 열차는 4열 종대로 좌석이 깔린, 무궁화호를 연상케하는 열차였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 전철하고 비슷한 좌석을 가진 열차에 탑승했다고 했다. 객차 상태는 열차 최종 목적지/시간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좌석은 낡아있었지만 꽤 넓었다.

나는 어렸을 적 시골로 가는 무궁화호의 기억을 떠올리며 - 언니랑 하도 떠들어서 차장 아저씨한테 많이 혼났던 기억, 음식 카드가 왔을 때 아빠가 과자를 사줬던 기억 등등 - 샌드위치를 까서 오물오물 해치워버렸다. 역시 열차는 먹는 맛이지.





3.5

배가 부르고 노곤노곤해지자 의식이 옅게 흩어지며 전날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웨이 덕분에 잘 놀았군.




리우행 버스에서와 타이중 공항으로 가는 오토바이에서 느꼈던 꾸물꾸물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상하게 웨이를 만나고 나면 여운이 깊게 남는다. 남녀간의 뭐 그런 게 아니라 인생에서 몇 번 만나기 힘든,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그리고 이 사람을 만날 인생의 쿠폰을 또 한 장 써버렸다는 아쉬움과...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등의... 내 문장력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하여간 그 꾸물꾸물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있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타이완에서 태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랐으며 타인을 돕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그 선량한 청년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잠들었다.





4.

곧 루이팡 역이라는 소리에 깨어 내리려고 했으나, 그 다음 역은 허우통이라고 알려주는 방송을 들었다. 어? 허우통?

허우통은 핑시선 초입에 위치한 역이며, 내가 방문하려는 첫번째 역이다. 거기 가려면 루이팡 역에서 핑시선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게 아닌가? 얼른 찾아보니 타이베이 중앙역에서 곧바로 허우통까지 가는 열차도 더러 있다고 했다. 아마 내가 탄 열차가 그건가보다.

운이 좋군! 덕분에 마저 타고 허우통까지 갔다.




생각보다 허우통 역에 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인기 역인가? 한적하게 둘러볼 순 있겠다.

역사에서 "루이팡 역까지만 표를 끊었었는데 얼마를 더 내야하나욤" 하고 자진신고를 했더니, 추가요금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패널티는 따로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대충 몇 십원? 몇 백원? 하여간 적은 돈을 내고 나왔다.




우선 표지판을 따라 캣 빌리지로 가본다.





허우통은 원래 광산 마을이었으나, 폐광이 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길고양이들만 남게 된 쓸쓸한 마을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사진작가에 의해 "고양이가 많은 마을"이란 게 알려졌고, 소문을 들은 애묘인들과 사진작가들의 방문이 늘어났으며, 마을 주민들 역시 수요에 맞춰 고양이 컨셉의 마을로 꾸몄고, 결국은 핑시선을 대표하는 관광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구석구석엔 고양이가 정말 많았다. 더운 낮이라 그런지 대부분 그늘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사람을 별로 피하지도 않더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천국일 수도 있겠다. 고양이 카페 야외 버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마을 규모 자체는 작다. 그래서 고양이에 별 관심이 없거나 꽉찬 일정을 즐기려는 사람에겐 지루할 수도 있겠다.

나는... 흥... 나는 뭐... 개파라서... 고양이 따위 뭐... 흥...




고양이... 나는 뭐... 그닥...




고양... 고양이... 고양이가... 고양이가 나는...





고양이가 너무 좋아...!


고양이는 진짜 최고다! 저렇게 도도하고 기품 넘치며 츤츤거리는 동물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핸드폰 들고 사진 한 장만 찍게 해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인간을 한심한 듯 내려다보는 저 오만한 눈동자의 야옹님.




다리 한 짝 뻗고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고양님.




잠에 취한 건지 귀찮은 건지 발바닥 만져도 자기만 하는 냥님.

뭐야... 여긴 천국이냐...




고양이와 관련된 구조물이나 벽화, 캐릭터 장식도 마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허우통은 '고양이'라는 테마 안에서 적당히 꾸며진 마을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벽화마을'에 면역이 된 사람들에겐 조금 심심하거나 식상한 수준의 꾸밈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래 이곳이 폐촌이었단 걸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고양이귀 머리띠 같은 게 있으면 사서 쓰고 다니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찾질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쁜 엽서 두 장을 구입했다. 저 엽서들은 지금 주방을 장식하고 있다.




허우통에는 고양이 이외에도 옛 탄광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작은 전시관과 건축물 등이 남아있다.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둘러보기에 좋을 것 같다.




대충 다 둘러봤다. 시계를 보니 다음 열차는 10분 뒤라고 한다.

역사로 돌아가 잠든 고양이 옆에 앉아 열차를 기다렸다.





5.

허우통을 1시간 정도 둘러본 뒤, 다음 열차를 타고 핑시로 향했다.

요 핑시선을 다니는 열차들은 대부분 1시간에 1대 꼴로 있다. 그걸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면 편할 것이다.




3량짜리 작은 디젤동차인 핑시선 열차.

노랗고 낡은 열차를 보고 두근거리며 탑승했는데, 이게 웬 걸, 사람이 너무 많다. 루이팡에서 관광객들을 잔뜩 싣고 왔나보다.




뭔가 평화로운 풍경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긴 했는데, 사람들에 밀리고 치이고 하다보니 그닥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다리가 아프군... 이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 그 역은 내리지 않고 지나치리라 다짐했다.

열차는 약 30분 정도 달려 스펀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다들 스펀역에서 우르르 내렸다. 어? 나 이 광경 학생 때 1호선 급행 열차에서 신도림역 정차할 때 많이 봤어. 딱 그 모양새군.

스펀역은 핑시선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을이다. 스펀 라오제에서 먹을 걸 사먹고, 언덕배기에서 풍등을 날리며, 스펀 폭포를 구경할 수 있는 곳... 하지만 사람에 치여 여기까지 온 내겐, 그저 관광객들이 무지 많아 또 치여야 하는 곳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패스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앉았다. 이 여유로운 객실... 넘나 좋은 것이다.




열차는 노선을 따라 달려간다. 이제야 좀 바깥 풍경이 보이고, 여유로움도 느껴진다.





6.

스펀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핑시역이었다. '핑시선'의 '핑시'라니 여기가 탄광 노선의 핵심마을이었을 것 같은데, 관광지로서는 그 위명을 스펀에게 빼앗긴 것 같다. 스펀에서 핑시역까지는 대충 15~20분 정도 걸렸다.




열차에 남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에 내렸다.






핑시는 생각보다 작고 조용한 동네였다. 아까 열차에서 슬쩍 지나치며 구경했던 스펀에 비하면 요일을 타는 동네라고 해야하나? 월요일이라서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꽤 보였다.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적한 거리를 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것보다 조금만 더 북적였으면 했다... 내가 까다로운 건가? 여긴 중간이 없군. 스펀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핑시는 인적 없이 고요하고. 뭔가 아쉽다.

핑시 역사 뒤로 나있는 소박한 라오제를 따라 걷다가, 냄새에 이끌려 한 가게에 멈춰섰다.




아닛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만 소세지 따창바오샤오창!

침을 뚝뚝 흘리며 바라보고 있으니 가게 아주머니가 웃으며 이리 오란다. 나는 홀린 듯이 가서 따창바오샤오창을 주문했다. 아주머니는 그 더운 날씨에 뜨거운 불 앞에서 소세지를 정성껏 구워주셨다.

값을 치르고 한 입 베어물었다. 따창도 샤오창도 최고야... 행복해...




그때부턴 아쉬운 것도 잊고 우물우물거리며 돌아다녔다. 역시 먹는 게 최고다. 냠냠.





마을 뒤쪽 언덕배기에서 바라본 핑시 마을.

올라가는데 무지 더웠다. 요 정도로 높은 곳이면 바람이 불법도 한데 시원한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야속한 언덕이었음.




요건 그 언덕배기에 있던 동네 절과 기도굴(?) 같은 것.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절이라니 뭔가 두근거리는 심령 이벤트가 있을까 싶었지만, 무지 현대적인 장식과 외관 및 새로 뽑은 듯한 자가용과 자재를 실은 트럭 등을 보고나선 짜게 식었다. 쩝.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도 있었는데 다들 땀 삐질삐질 흘리며 뭔가 기대하고 올라왔다가 실망한 눈치였다. 동지 된 마음으로 다함께 털레털레 내려갔다. 빨리 그늘이 있는 라오제 쪽으로 돌아가자.

나중에 구글맵 둘러보다가 알게 된 건데, 저 동네 절 근처에 Eight Spirits Cave라는 구경함직한 동굴 하나가 있다고 한다. 누가 올려놓은 사진을 봤는데 제법 괜찮더라. 나와 저 다른 여행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금방 내려가버렸으니 아쉬운 일이다. 두근두근 심령 이벤트가 그 동굴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데. 흑흑.




핑시 마을은 강을 끼고 있어서, 작은 다리들이 두어개 있다. 그런 다리들이 마을 전반에 아기자기한 맛을 더해주는 것 같다.

핑시 라오제의 끄트머리, 지룽강 쪽으로 가면 보다 큰 석조다리가 나오는데, 석조다리 건너 큰길가에서 버스를 탈 수 있더라. 볼 건 다 봤는데 기차가 오질 않아, 시간이 맞으면 버스를 타고 바로 징통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타이밍을 못 맞췄군. 아쉬워라.

버스 시간 물어보려고 큰길가에 있던 편의점(세븐일레븐으로 기억한다)에 들어갔다가, 물 한 병 산 뒤 화장실 이용하고 나왔다. 비교적 깨끗했으니, 혹시라도 핑시 마을에서 화장실 찾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참고하시길 바란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핑시역으로 돌아가, 징통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핑시선은 보통 1시간에 1대꼴로 다니기 때문에, 마을 구경이 끝났는데도 떠나지 못하는 애로사항이 있다. 하하.




시간이나 때울 겸 역 근처 기념품점을 기웃거리다가, 죽통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이 핑시선의 종착역인 징통 역에선, 소원을 죽통에 적고 걸어두는 포인트가 따로 있다고 했다.

시간도 남는데, 죽통에 소원이나 적어볼까? 그리고 징통 역에 가서 얼른 걸어두고 오는 거야.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와 죽통을 구입한 뒤, 가게 한 켠에 마련된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손가방을 내려놓고,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가게에서 빌린 네임펜으로 무슨 소원을 쓸 지 고민에 빠졌다. 가게 주인이 돌려준 선풍기 바람은 시원했고, 아이스크림은 달았으며, 가게 안쪽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무지 행복하다. 소원? 어쩌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걸.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가게 주인은 천천히 쓰라며 웃었다.

...

아! 생각났다!





죽통에 소원을 쭉 적은 뒤, 가게 주인에게 네임펜을 돌려줬다. 가게 주인은 내 한글을 알아보진 못했으나, 그 소원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고마웠다.

밖으로 나가,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핑시선 열차에 탑승했다. 다음 역은 핑시선의 종착역인 징통역이다.





7.

5분 정도 걸려, 징통역에 도착했다.





징통은 자그마하고 오밀조밀한 목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소소한 동네였다. 종착역이라는 타이틀이 있다보니 스펀만큼은 아니지만 핑시보다는 관광객들이 있어, 규모에 비해 활기찬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과 열차 배차 시간 때문에 애매했다. 아무래도 한 시간 뒤에 타면 늦을 것 같고, 천상 바로 다음 열차를 타야만 했다. 차장에게 물어보니 다음 열차는 15분 뒤에 있단다. 물어보다가 1분이 지나 14분 남았다.

14분... 짧네...

...아니, 아니지! 죽통을 걸고 커피 한 잔 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힘차게 역 밖으로 나갔다.




역에서 얼마 걷지 않아, 죽통이 잔뜩 매달린 거리를 발견했다. 이곳에 소원을 거는 건가 보다.




그 죽통거리 앞에, 소박한 카페 하나가 있었다. 뭐야, 여긴? 이 몸께서 딱 커피 주문하기 좋게 생겼군!

나는 성큼성큼 들어가 가게 언니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달라고 했다. 계산을 한 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바깥 구경 좀 하다가 들어오겠다고 했다. 주인이 일회용 잔을 원하냐고 물었지만, 환경을 사랑하는 enat은 유리잔에 달라고 했다.

괜찮아, 신에게는 아직 12분이 남아있습니다!




죽통을 매달고 카페로 돌아와 커피를 받았다.

가게 내부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고, 가게 언니는 원하는 자리에 마음껏 앉으라고 했다. 테이블과 의자는 낡았다는 것을 제외하곤 통일성이 없었는데, 그게 이 카페의 앤틱한 분위기를 더 살리고 있었다.

내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매끄러운 정사각형의 유리잔에 담겨, 초코 웨하스와 함께 서빙되었다. 이 각진 유리잔... 굉장히 유니크하잖아! 얼음도 딱 깨물어 먹기 좋은 사이즈였다. 이런 디테일 좋아!




이렇게 멋진 카페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아쉬운 일이군. 나는 커피를 무슨 콜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며 만족해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까지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열차시간 3분을 남겨두고, 커피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잘 마셨다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카페 언니는 왜 벌써 가냐고 걱정하며 물었고, 혹시라도 오해를 할까봐 걱정이 된 나는, 30초 정도를 할애하여 '나는 징통에 단 15분 머물렀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이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에 방문하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쉬지 않고 전달했다. 카페 언니는 고맙다고 했고, 나는 안심하며 역으로 달려갔다.




징통역에 도착했다!




세이프다!





8.

열차 안쪽에 앉아 루이팡까지 편하게 갔다. 이어폰 속에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아까 왔던 길을 되짚는게 즐거웠다. 내내 조용하다가, 스펀에서 아까 내린 만큼의 여행자들이 또 잔뜩 탑승했다. 확실히 스펀이 인기많은 곳이긴 한가보다.

루이팡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타이베이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가지고 나와,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가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는데, 인타운 체크인 표지판을 보았다. 타이베이에도 도심공항이 있단 말야? 몰랐다! 마침 어깨가 무거웠기에 표지판을 따라 도심공항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체크인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짐 보내는 시간 때문에 체크인 못 할 뻔 했다. 알았다면 아침에 해두는 건데. 하하.

덕분에 가벼운 손가방만 들고 공항으로 갔다.





9.

타이베이 공항 라운지엔 샤워실이 있었다. 저번에 다낭 공항 라운지에도 샤워실이 있어서 유용하게 사용했는데, 더운 나라들은 샤워실이 기본 옵션인가 보다.




샤워하고 나와서 맥주 잔뜩 마시다가 비행기 타러 갔다.

귀국행 비행기는 에바 항공.

항공권 티켓을 구입할 때 유니온 페이로 구입했는데, 마침 유니온 페이로 구입한 사람들에게 와이파이 쿠폰을 준다길래, 기내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했다.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야 제법 오래전에 시작된 서비스지만 실제로 써본 건 처음인지라 좀 신기했다. 나야 카톡 보내고 블로그 뒤적거리고 하는데에 썼지만,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에겐 편리하겠구나 싶었다.

인천 공항에선 친구가 픽업해준 덕분에 집에 빨리 왔다. 별 문제 없이 여행이 끝났고, 기분 좋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만 남았다. 근데 그러질 못했다.

집에 오자마자 그닥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적인 문제라 자세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내 당시 기분만 쓰자면 뒷통수 제대로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여행 가방을 정리할 새도 없이 마음은 울적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몇 주 정도 얼얼한 뒷통수 만지작거리며 정신 못차리고 지냈다.





10.

시간이 제법 지난 어느 날, 핸드폰으로 찍어둔 사진을 정리하다가, 여행 중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 이 행복한 여행의 느낌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그건 핑시선의 종착역에 걸어두었던, 나의 소원이었다.

맙소사.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행복한 여행의 느낌은커녕, 내가 이런 소원을 빌었다는 것 자체를 잊고 있었다.

작은 소원이 적힌 죽통을 보고 있자, 타이베이에서의 추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짐가방 사이에 아무렇게나 끼워져있던 일기장을 찾아 펼쳐보았다.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온천을 즐긴 후 도서관 테라스에 앉아 일기를 쓰던 기억, 해안 공원에 앉아 수영복을 말리며 휴식을 취했던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 반짝반짝 불이 켜진 부둣가에서의 산책, 야시장에서의 만담과 숨이 찼던 야경, 이어폰을 꽂고 몸을 실었던 작은 열차와 간이 의자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소원을 적어 내려갔던 기억까지.

이 행복의 순간들을 나는 왜 잊고 있었지? 나 이 때 정말 즐거웠었는데! 그러자 마음 속을 괴롭히던 일들이 보란 듯이 작아졌다. 이깟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는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잖아, 계속 그래왔잖아! 하고.

지난 여행의 기억 덕분에, 나는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빠르게 회복했다. 바다 건너 한국까지 도착하느라 몇 주 정도 걸린 내 소원은, 그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 그러고보니 요런 소원도 빌었었다.



살면서 삶에 자꾸 먹혀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여행을 떠나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어두면 좋을 이유를 또 하나 찾았다. 언젠가는 그 기억이 힘든 일에 대한 카운터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이번 여행이 내게 그랬다.

징통역에 걸어놓은 죽통처럼, 세상 어딘가에 또 나의 소원을 작게 남겨두러 가보자. 그 작은 소원이 언젠가 힘든 시기를 지나게 될 나를 찾아와 도와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요 죽통 이야기로 마쳐야겠다.




끗!






덧글

  • 2019/07/24 00:3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8/17 22:3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우레 2019/07/24 10:35 # 삭제 답글

    아, 핑시선이네요. 미리 하여야할 것들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모레 루이팡역에 갑니다. ㅋㅋ) 속상하신 일, 잘 되도록, 잘 이루어지기를...
  • enat 2019/08/17 22:33 #

    아래 덧글 보니 잘 다녀오신 것 같으셔서 제가 다 기쁘네요!! 여행 앞두고 전해주신 응원과 격려 넘 감사드려요!! 지금은 걱정해주신 덕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 kanei 2019/07/24 21:43 # 답글

    원래 올해 일본 여행을 친구랑 갈까 했는데, 예정변경해서 대만이랑 다른 동남아 고려중이에요! Enat님 여행기 참고해서 동선 짜봐야겠네요 ㅎㅎ
  • enat 2019/08/17 22:35 #

    베트남도 괜찮더라고요! 작년에 다녀온 다낭이 넘 괜찮아서 조만간 한번 더 가려고 생각중이여요. 태국 방콕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가서 만족했었어요! 아주 조금 참고만 해주세용! ㅋㅋㅋ
  • 좀좀이 2019/07/25 03:48 # 삭제 답글

    허우퉁에는 고양이 많군요.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이 좋아하겠어요. 개파라지만 허우퉁의 고양이들 매력에 어쩔 수 없었군요 ㅋㅋ 마지막을 죽통 이야기로 마무리한 거 참 인상적이에요^^
  • enat 2019/08/17 22:38 #

    고양이 좋아하는 분들은 많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ㅋㅋㅋ 마을 자체는 조금 작은 편이고 둘러보면서 에게? 소리가 나올 수 있으나 그 구석진 곳에 하나 둘씩 숨어있는 고양이들이 넘 매력적이었어요!
    소원 써서 어딘가에 거는 거 별로 안좋아했었는데 죽통 이후로 곧잘 써지더라고요 ㅎㅎㅎ 감사합니당
  • PennyLane 2019/07/28 19:17 # 답글

    대만을 두번 갔는데도 한겨울에만 가서 그런가 교외 여행을 제대로 못 했어요. 핑시선 꼭 가봐야겠어요. 사실 블로그 후기 잘 안 믿는데 이낫님 픽은 믿습니다
  • enat 2019/08/17 22:42 #

    핑시선은 도시 구경이 식상하시거나 관광 후 시간 여유가 있으실 때 한숨 돌리기 좋은 것 같아요! 다만 주말이나 연휴 때 가시면 인파에 밀려 고생하실 것 같아 강력 추천은 잘 못드리겠군요 ㅠㅠ 믿어주시는데 부응할만한 포스팅을 해야하는디 흑 노력하겠슴당!
  • 레아 2019/08/01 11:07 # 삭제 답글

    허우통 고양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에겐 천국일거 같아요
  • enat 2019/08/17 22:44 #

    앗 고양이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ㅋㅋㅋ 고양이 많이 좋아하시는 분들껜 사진 찍기도 머물기도 괜찮을 곳일 거에요! ㅋㅋㅋ
  • 우레 2019/08/06 19:54 # 삭제 답글

    이낫님, 핑시역에 있는 동네 절과 기도굴(->일제시대 파놓은 피난 동굴) 같은 것에 갔었습니다.바로 옆에 Eight Spirits Cave이 있는데요, 이름은 거창합니다만 이것도 규모가 큰 피난 동굴이었습니다. 물론 자연 동굴은 아니구요, 참 시원했었답니다.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입구는 절에 부속된 다른 건물 입구처럼 보이더군요. 일부러 찾아 보기 전에는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낫님 덕분에 방공 피난 대신 더위 피난하고 왔습니다.... 이낫님 다른 글에서 다른 여행지에 대한 다른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주는 곳을 더 찾아볼랍니다.
  • enat 2019/08/17 22:58 #

    제가 포스팅도 덧글도 늦어 많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했었는데 여행 잘 다녀오신 것 같아 넘나 기뻐요! 특히 가보지 못했던 Eight spirits cave에 대해 추억을 곁들여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제가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넘 감사드립니당 ㅋㅋㅋ 다음 여행에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게 다른 여행기도 열심히 써볼게용!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