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18:16

방콕 주말여행 (5) 둘째날 하루종일 └ 방콕 주말여행 (2019)

1. 아침식사

방콕에 와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

밤새 에어컨을 신나게 틀어놓은 대가로 목이 칼칼했다. 침대 주변에는 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이 대충 포장되어 있었다. 한입 퍼먹었으나 어제의 그 맛이 나질 않았다. 에잉,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자.

옷을 대충 입고 거리로 나갔다.




한참을 헤맸으나 영 끌리는 집이 없다. 앞으론 무조건 조식 포함된 호텔로 잡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냥 사람 많은 음식점엘 들어갔다. 사람이 많으니 평타는 치겠지.

가게이름은 The Macaroni Club(Chakrabongse Rd, Talat Yot, Phra Nakhon, Bangkok, https://goo.gl/maps/43MK1uqkqy5kHCP66). 람부뜨리 거리에 있다.




전부 야외 테이블이라 살짝 더운감이 있었다. 그늘과 선풍기의 바람, 파리의 이동경로를 고려하여 최적의 자리를 찾는 통에 자리를 두어번 옮겼으나, 웨이트리스는 웃으며 대응했다. 프로다, 프로.

주변을 둘러보니 대체로 서양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커피나 빵, 계란후라이 정도였다. 나도 저렇게 먹을까 하다가, 제대로 된 요리를 먹고 싶은 마음에 팟타이(140바트)를 골랐다. 시키고 나니 왠지 아침에 달걀이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오믈렛(40바트)도 시켰다. 커피를 먹을까 하다가, 커피는 이따 카페에서 먹기로 하고 여기선 쥬스를 먹자 싶어서 수박쥬스(45바트)를 주문했다.

별 생각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주문했는데, 막상 요리가 나오자...




너무 많았다!

이렇게까지 양이 많을 줄은 몰랐다. 뭐야, 이 넓고 두터운 오믈렛... 계란 네 개는 쓰였을 것 같다... 팟타이도 엄청 본격적이잖아... 아침인데 주변 테이블처럼 적당히 아기자기하게 주지, 왜 이렇게 푸짐하게 나온 거야.

...지가 시켜놓고 가게를 탓하는 enat이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서양인들은 내 아침 식단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기네들끼리 쑥덕였다. 아침부터 저런 본격적인 식사라니, 저 작은 소녀(나다!)의 뱃속에 저 음식이 정녕 다 들어간단 말인가, 동양 무술의 근원은 음식이었나 어쩌구 하는 이야기였을 것 같다.

맛은... 사실 맛은 그냥 그랬다. 그렇게 맛없지도, 그렇게 맛있지도 않았다. 근데 왠지 남기면 옆 테이블 사람들이 '역시 그렇지, 저 작은 동양인이 저렇게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리가! 주문을 잘못 넣었을 거야.' 라고 생각할까봐 (아마 그들은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나 혼자 그리 생각했다!) 꾸역꾸역 먹었다.

우걱우걱 쩝쩝.





2. 운동

접시만 남기고 다 먹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았고 곧이어 칼로리에 대한 죄책감이 찾아왔다. 난 또 이렇게 많이 먹어버렸구나...

먹은 만큼 소비하기 위해 운동을 하기로 했다. 일단 태국이니까, 무에타이가 유명하겠지. 무에타이를 배우러 가야겠다. 나는 구글로 무에타이 학원을 검색한 후 거리상으로 배열하여 가장 가까운 곳으로 찾아갔다.

Muay thai street (Phra Sumen Rd, Chana Songkhram, Phra Nakhon, Bangkok, https://goo.gl/maps/yV5pU2tqozbLVu9V6)




사진은 무에타이 학원의 무에타이 격투장(?). 밤마다 격투쇼(?)를 벌인다고 한다.

학원까지 거리가 가까워 걸어갔는데, 날씨가 굉장히 습하고 더워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슬러쉬가 되어가는 enat은 무에타이 학원 앞에서 '내가 왜 돈을 내고 고생을 해야하지?' 하는 생각(← 운동 안하는 인간들의 대표적인 변명)을 했다. 그래서 몸을 돌렸다.

이왕이면 에어컨 바람을 쐬며 얌전한 운동을 하자. 그래, 요가가 좋겠다!

나는 구글로 요가 학원을 검색한 후, 지도에 나온 곳 중 심혈을 기울여 골라 그곳으로 찾아갔다. 중심가 시암 쪽이어서, 시내 구경도 할 겸 그쪽으로 택시타고 이동했다. 택시비로 81바트 냈다.

Empower Yoga Bangkok (Baan Kasemsan Condo, 24/1, Wang Mai, เขต ปทุมวัน. https://g.page/Empoweryogabangkok?share)




찾아간 요가 학원은 무슨 고급진 빌라 1층에 위치한 곳이었고, 초심자부터 숙련자까지 시간대마다 다양한 코스가 짜여 있었다. 그래, 여기라면 운동 초보인 나도 즐겁게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요가로 몸을 풀고 마사지를 받으면 얼마나 개운할까! 나는 힘차게 문을 열어제꼈다.

아니, 제끼려고 했다.

문은 잠겨있었다.

알고보니 오늘은 일요일. 이 요가 학원은 일요일마다 문을 닫는 학원이었다. 운동은 주말에 하는 거 아냐!? 주중에 일하는 것도 힘든데 시간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거냐고!? 운동을 안해봐서 주말엔 하면 안되는 건 줄 몰랐어!

일부러 택시 타고 큰 길가에 내려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뭔가 허탈하다. 타고 온 택시도 기사아재가 길을 잘 몰라서 내가 구글 보면서 길 알려줬는데, 똥 빠이(직진), 꽈(오른쪽), 사이(왼쪽) 외치면서 인간 내비게이션 해주느라 완전 지쳤는데. 넘나 짜증나는 것이다.

에이씽, 내 주제에 무슨 운동이야.

카페 가서 케이크나 먹자.





3. 시암

문 닫은 요가 학원이 시암 뒷골목 쯤에 위치한 덕분에, 바로 시암 큰길가로 나갈 수 있었다.

방콕의 중심가인 시암은 화려한 백화점들이 줄지어 있다. MBK 센터, 시암 디스커버리, 시암 센터, 시암 파라곤, 시암 스퀘어원 등등. 내부에 각 건물을 잇는 통로가 있거나, 외부 통로더라도 지붕을 설치해놓은 곳이 많아, 비가 오더라도 맞지 않고 각 쇼핑몰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래는 시암에 있던 쇼핑몰 간략 요약.




- MBK 센터 : 외부는 백화점인데 내부는 지하상가 같은 느낌. 로컬 브랜드가 많아 보인다.




- 시암 디스커버리, 시암 센터, 시암 파라곤 : 세 건물이 나란히 서있으며 통로가 나있어 다니기 편함. 우리가 아는 '백화점'임. 다들 아는 유명한 브랜드 점이 많음. 셋 중 파라곤이 제일 고급져 보였다.




- 시암 스퀘어원 : 실외 쇼핑몰 구조라 더움. 스타벅스, 미니소, 다이소 등등 익숙한 점포들이 많이 보였다. 청년들의 약속 장소 느낌.





4. 애프터 유

구글 지도로 카페를 검색한 뒤, 요 근방에서 평점이 제일 높은 카페를 찾았다... 도대체 구글이 없던 옛날엔 어떻게 여행을 다녔었지? 가이드북 따위를 읽으며 종이지도가 너덜거릴 때까지 피고 접고를 반복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데...

하여간 평점이 제일 높았던 카페는 애프터 유 디저트 카페였다. 방콕에선 유명한 프랜차이저라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찾아갔다. 검색 한 번만 하면 알 수 있는 세상인데 검색을 안해서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시암 일대에만 애프터 유가 4~5개 정도 되는 것 같던데, 그 중 MBK 센터에 있는 애프터 유엘 찾아갔다.

메뉴가 생각보다 많길래 어버버하며 골랐으나, 그런 외국인 손님들이 평소에도 많은지, 가게 직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상냥하게 대해줬다.




직원들의 격려를 받아 마침내 주문한 Lavender Lychee Soda (125바트), Butter Bun (100바트).

라벤더+리치+소다는 이상한 조합이구나 했는데, 직원들이 이거 꼭 먹어봐야 한다고 너나할 것 없이 추천을 하는 바람에 시켜봤다. 근데 진짜 시도의 가치가 있는, 맛있는 음료였다. 계속 마시다보니 포도맛 소다에 라벤더 향을 첨가했구나, 사실 별 건 아니구나, 반쯤 먹고나니 조금 질리는구나 싶었는데, 처음의 그 한모금이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일기장에는 "무에타이 요가를 뛰어넘는 맛이다!"라고 적혀있는데, 아마도 무에타이 학원과 요가 학원에 가지 않은 것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는 소리...라고 적은 것 같다.

버터 번은 양이 무지 많았다. 다 먹지는 못했는데 후회는 없었다. 빵이 버터 크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말인 즉슨 칼로리 폭탄 번이라는 건데... 도대체가 고칼로리는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이냐. 운동 못한 한을 담아 잔뜩 뜯어 먹었다. 우어어 우걱우걱.





5. 솜땀누아

애프터 유에서 달달한 놈들을 해치우고 좀 걸었다.

아까 3번에서 설명했던 MBK 센터, 시암 디스커버리, 시암 센터, 시암 파라곤을 구경한 뒤, 전철을 가로질러 시암 스퀘어원으로 건너왔다. 다른 백화점들은 내부 외부가 뚜렷하게 구분된 건물이었는데, 시암 스퀘어원은 공간 경계가 모호해서 더 모던하고 친환경적으로 느껴졌다. 실외 쇼핑몰이라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없어서 무지 더웠지만 건물이 예뻐서 참을 만 했다.

시암 스퀘어원을 돌아다니다가, 뭐 먹을 만한 거 없을까 하고 돌아다니다가 '솜땀누아'라는 곳을 발견했다. 아침을 많이 먹고 디저트까지 많이 먹어서 배부른데, 가볍게 솜땀 정도만 요기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솜땀누아 (https://goo.gl/maps/m8fAYKK6rx2HQLdj7)




위치를 대강 설명하자면 시암 스퀘어원 뒷쪽의 노점상 근처. 오른쪽 사진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간판이 그 솜땀누아 간판이다.

여담이지만 여기 바로 근처에 애프터 유 단독 점포도 있더라. 단독 점포에다가 외관이 예뻐서 그런지 다른 애프터 유 카페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갔던 MBK 애프터 유는 나 합쳐서 3명 있었는데...




솜땀누아 가게 내부로 들어왔다.

공간이 넓고 사람은 많은데 직원은 느렸다. 후불제였는데 먹튀해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응이 느렸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착실하고 선량한 여행자라서 먹튀라는 생각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며 음식을 주문했다.

메뉴판엔 친절하게도 음식 사진과 추천 마크가 달려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Must Try가 많아? 이 집 추천메뉴를 다 먹으려면 사람 열댓명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추천대로 돼지고기 뼈 수프(120바트)와 솜땀(90바트)을 시켜먹었다.

돼지고기 뼈 수프는 건강하게 생긴 주제에 맛은 자극적이었다. 무지 짜고 셨다. 메뉴에 있는 사진을 보고 예전에 대만에서 먹었던 돼지고기 탕을 생각하며 시킨 거였는데 전혀 다른 거였다. 아쉬워라.

솜땀엔 말린 새우랑 가쯔오부시 같은 맛이 나는 튀김(?)이 들어있었다. 이것도 좀 짰는데, 단맛이 함께 나서 괜찮았다.

총평 : 전반적으로 간이 세다.





6. 커피

이 자극적인 맛을 떨치기 위해 다시 스퀘어원으로 돌아가 커피를 주문했다. 들어간 곳은 카페 아마존이라는 곳.

Café Amazon (388 Rama I Rd, Pathum Wan, Pathum Wan District, Bangkok, https://goo.gl/maps/KXUq5FBCVxTA1MVRA)




그냥 아메리카노로 시킬 것을, 이 달의 신메뉴 광고판을 보고 '에그 커피'를 시켰다.

실은 하노이에서 먹었던 그 달달하고 부드러운 에그 커피를 상상하면서 시킨 거였는데, 맛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여기 에그는 삶은 달걀을 으깨서 넣은 건지, 도대체가 맛이 텁텁하고 밍숭맹숭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두 모금 마시고 버렸다. 아쉽군.





7. 마사지

쇼핑은 피곤한 것이다.

숙소 근처로 돌아와 마사지 2시간 받고 잤다.

...사실 마사지는 그냥 그랬다. 밍숭맹숭했다. 그러니까 잤겠지. 쩝.





8. 호텔 로비의 저녁

숙소 근방 노점에서 뭔가 태국스러운 옷을 샀다. 여태까지 동네 슈퍼 가는 차림으로 다녔는데, 급 꾸미고 싶어져서 이쁜 옷을 구입해봤다. 쪼꼬만 고데기로 이케저케 머리를 하고, 몇 안되는 화장품으로 이케저케 화장을 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꾸미는 건 즐거운 일이다.




원래 계획은 준비하자마자 왓 아룬이 보인다는 루프탑 바에 가는 거였는데, 혼자 호텔에서 신나가지고 이 각도 저 각도로 사진 찍으며 놀다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평소에 그지꼴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이럴 때 사진을 많이 남겨놔야 한다. 우헬헬.

자아도취 상태로 사진을 찍은지 어언 30분.

슬슬 배가 고파지길래 카메라와 지갑 등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근데 비옴 ㅋㅋ... ㅋㅋㅋㅋ...

그것도 폭우가 온다... ㅋㅋㅋ...ㅋ.ㅋㅋ....

이틀 만에 모처럼 이쁘게 꾸미고 야경 보이는 루프탑 바에 가서 사연있는 여자처럼 앉아 남자 좀 꼬실라고 했더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슬비처럼 조용히 오는 게 아니라 장대비가 퍼붓고 있다!

오오냐, 내 계획이 그렇게 마음에 안든단 말이냐! 양 많은 아침식사, 더운 무에타이 학원, 이상한 택시, 문 닫은 요가학원, 간이 센 음식과 텁텁한 커피, 밍숭맹숭한 마사지까지, 하루종일 맥이 빠지길래 루프탑 바 가서 맥주 먹으려고 했다! 근데 루프탑 바도 가지 말라는 거냐! 남자고 사연이고 야경이고 하지 말라는 거냐!?

흐어엉!




실컷 꾸몄는데 다시 객실로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이게 스콜이라면 1시간 정도 오다가 말겠지 싶어서, 호텔 1층의 야외 펍으로 가서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근데 가격이 왜 이러지? Leo가 100바트였다.

내가 지금 레오를 100바트에 사먹고 있다. 레오를 100바트에 사먹고 있다.

일기장에 2번이나 써있다. 저 저렴한 맥주를 100바트에 사먹다니 믿기지가 않는 모양인 듯. 대충 느낌은... 하이트를 1만원에 사먹고 있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슬픈 눈으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펍에선 라이브 가수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라이브 가수의 노래는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노래소리를 듣고 찾아올 만한 사람들이 있을 법도 한데, 비가 퍼붓는 통에 길거리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초반에 자리잡은 손님들만 그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에 루프탑엘 못가서 심통 난 손님이 방금 한 명 추가됐다.

차분하고 깨끗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원수처럼 퍼붓는 저 비도 세상의 때를 구석구석 씻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인지 음악이란 위대한 것이다. 나는 그새 레오를 100바트에 사먹은 것도 잊고, 가수의 노랫소리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서정적인 빗소리, 은은한 전구 불빛, 맥주 한 모금... 완벽해! 루프탑 거길 왜 가?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그래, 이 참에 여기서 저녁도 해결해버리자!

레오를 100바트에 파는 펍에서 음식까지 시키는 enat이었다.




이건 음식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린 그림.

일기장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나의 심신이 몹시 평온하고 평화롭다는 증거다.




잠시 후 나온 Massamun curry chicken (285바트). 솔직히 맛은 평범했는데, 분위기가 좋아서 즐겁게 먹었다. 이건 전적으로 다 라이브 가수의 덕이다.

비는 내가 커리를 다 먹어갈 즈음에 그쳤고(스콜이 맞았나보다), 라이브 가수의 공연도 그와 거의 동시에 끝났다. 그 가수는 비 때문에 사람이 못 온 걸 가지고 자신의 공연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기 다음엔 더 훌륭한 가수가 좀 더 신나는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럼 더 흥겨운 분위기가 될 거라고 말하며 기기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아냐, 당신 잘했어요. 나는 가수의 공을 잊지 않고 팁을 넉넉히 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들 넉넉한 팁을 챙겨줬다.

실은 이번 '방콕 여행'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바로 이 날, 이 시간이다. 회사 모니터 옆엔 이 때 찍은 맥주 사진이 몇 개월간 걸려있었는데, 한동안 그 사진을 보며 심신의 안정을 찾곤 했었다.

돌아가서 머물고 싶은 시간대가 이렇게 또 하나 생겼다.





9. 루프탑 바

비가 그친 뒤, 원래 계획대로 택시를 타고 왓 아룬 야경이 보이는 루프탑 바에 갔다.

거기까지 가는데 택시 세 대를 보내고 네 번째 택시에 탔는데, 두 대는 미터기 없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러서, 한 대는 자기가 에스코트 해주겠다는 헛소리를 해서였다. 사실 네 번째 택시라고 미터기를 켜놓은 것도 아니었고, 가격이 합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군말 안하고 "100바트"를 이야기하길래 그냥 탔다.

으음, 이 동네 택시들은 밤이 되면 미터기를 다 꺼놓고 배째라 장사를 하는구나.

다음엔 반드시 그랩을 깔고 오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왓 아룬 사원의 강 건너편 야경이 이쁘다길래 그냥 그 쪽으로 가달라고 했는데, 어째 거리엔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이 음산하고 인적도 드물어 스산했다. 비가 와서 다 닫은 건가? 아니면 원래 이 시간엔 다 닫는 건가? 조금 무섭다.

거리에서 두리번거리다가 구글이 알려주는대로 루프탑 바 입구에 들어섰다. 루프탑도 닫았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여기서부턴 뭔가 인기척이 느껴진다. 안심하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Eagle Nest Bar (47-49 ถนน มหาราช Soi Phen Pi Marn,Tha Tien, Phrabarommaharajchawang Phra Borom Maha Ratchawang, Phra Nakhon, Bangkok, https://goo.gl/maps/ZzQkUivimNhJuPk7A)




루프탑 뷰 엄청나잖아!

왜 사람들이 왓 아룬 야경, 왓 아룬 야경 하는지 알겠다!

솔직히 이 정도까진 기대도 안했는데 어마어마한 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우와 짱이잖아! 우와 쩔잖아! 우와 대박이잖아!"를 연신 외쳤다. 태국인 바텐더가 나를 보고 웃으며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가운데 서서 계속 그 소리를 외치기만 했을 거다.

테라스 쪽에 딱 한 명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앉았다.

다들 커플로 와서 그 좌석은 비어 있었나 보다.

다들 커플로 와서...

다들 커플로...

다들 커플이잖아! 여기서 사연있는 여자인 척 앉아있어봤자 말 걸어주는 남자 하나 없겠네!




비록 주변엔 셀카 찍는 커플과 서로의 뒷모습 찍어주는 커플과 술잔 기울이는 커플과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 뿐이지만 나는 풍경 감상에 전념하겠다.

다행히도 내 자리는 테라스 바로 앞. 시선만 왓 아룬에 고정하면 된다. 고독을 씹는 여행자가 되어주갔어.




그나저나 이런 훌륭한 풍경에 레오나 싱하를 끼얹을 순 없지.

고오급진 아사X를 마시자!

나는 아X히가 넘나 죠아!

...이 때는 일본 불매 운동 전(2019.06)이었고, 나는 아사히 병을 든 채 신나게 셀카를 찍었으며,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사진들을 프사에서 내려야만 했다.




차마 올릴 수가 없어서 모자이크 처리한 그 맥주.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술을 먹었어야지. 역시 레오를 먹었어야 했다. 레오가 짱이시다.





다시 여행으로 돌아와서.

곧 지울 프사용 사진들을 마구 찍어대던 enat은, 결정샷 2컷 정도 건진 뒤 좀 더 풍경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황금색 사원을 조명삼아 새카만 강가를 흐르는 크고 작은 배들을 보고 있으니 감상적이게 된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예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그럼 또 자연스레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감상과 감사는 초성이 같아서 그런가 늘 붙어다닌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은 다 허락하신 덕분에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찾아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지, 포기라는 단어는 별론 거 같다. 선택 정도가 어울리는 말이겠다. 세상에는 선택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안다. 그러니 말한다. 선택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빛나는 사원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했는 모양이지. 일기장에 그렇게 적혀있더라.





10. 다시 숙소로

그랩도 없는데 돌아가는 택시를 어떻게 잡나, 꼼짝없이 바가지 쓰겠구나 하고 걱정했다. 근데 다행히도 나오자마자 택시 한 대를 만났다. 나는 그 택시를 붙잡으며 외쳤다.

나 : 왓 차나 송크란!

택시 아저씨는 나를 태우며 100바트라고 했다. 그 정도면 무난하지. 일단 탔다.

그런데 택시 아저씨가 백미러로 나를 자꾸 흘끔거린다. 왜 저러지? 택시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혹시 태국인이냐, 아무리 봐도 태국인은 아닌데, 그렇다면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이냐고 물었다.

엥? 나는 평범한 여행자라고 밝혔다. 그러자 택시 아저씨는 웃으면서 내 발음이 완전 현지인이라 분명 여기 오래 산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내친김에 오늘 요가학원 갈 때 택시기사에게 길 알려주면서 익히게 된 똥 빠이(직진), 꽈(오른쪽), 사이(왼쪽) 등등을 말했더니 놀라워하며 장기여행자구나 어쩌구 하며 자기 혼자 납득하더라.

어... 이틀째지만요. 아직 이 나라에 발 붙인지 이틀쨉니다.




그나마도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셋째날에서 계속.






덧글

  • 사키 2019/12/01 23:41 # 답글

    저도 8월 즈음에 태국 갔었는데... 여행기를 써야지 싶었다가 홀랑 까먹고 enat님의 여행기를 즐겁게 읽어보다가 그 생각이 다시 급 났습니다 ㅋㅋㅋ 왓아룬의 야경이 넘나리 예뻐서 저도 카톡 프사로 해놓고 있다는 ㅎㅎㅎㅎ
  • enat 2019/12/23 18:04 #

    여행기 써야지 싶었다가 홀랑 까먹는 거 넘나 공감이네요. 그렇게 잊혀진 여행들이 상당한데 말이죠... ㅋㅋ
    왓아룬 야경 예쁘죠! 저도 한동안 프사였었답니당 ㅋㅋㅋ
  • 우레 2019/12/02 20:59 # 삭제 답글

    이낫님, 사진을 잘 찍으시니 이참에 여행사진 작가로 나아가시지요. 야경사진이 참 좋네요. 일본 관련해서는 되도록 긍정적이지 않은 것만 남기게 되네요...
  • enat 2019/12/23 18:06 #

    사진 작가를 하기엔 많이 부족합니당 ㅋㅋㅋ 더 멋지게 찍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봐서요 ㅋㅋㅋ
    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많이 껄끄럽죠. 언제쯤 사이가 좋아질런지요...
  • 타마 2019/12/06 16:56 # 답글

    오오... 저도 11/30~12/2 갔다왔어요. 싱기방기 ㅋㅋ
    시암 1층에서 먹은 음식에 치를 떨었지요... 맛없고, 비싸고, +17% 붙어서 화났고...
  • enat 2019/12/23 18:07 #

    다녀오신지 얼마 안되셨네요!
    맛없고 비싼 음식만큼 부들부들하게 만드는 게 또 없죠.
    이눔들아! 맛없게 할거면 팔지를 말아라! ㅜㅜ
  • 뭐죠이블로그 2019/12/06 21:37 # 삭제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블로그 머죠 넘 재밋는데
  • enat 2019/12/23 18:07 #

    그렇게까지 재밌는 건 없지만 감사합니다!
  • 찾았다몽골모자 2019/12/11 01:02 # 삭제 답글

    역시 여행블로거 맛집입니다 폰을 바꾸면서 블로그를 찾아보려다 몽골여행시 모자 샀던게 기억에남아 검색하니 나오더라구요 ㅋㅋㅋㅋ 넘 반가워요 찾게되어 ㅋㅋ 그다음편 올려주시죠 궁금궁금
  • enat 2019/12/23 18:08 #

    몽골모자!
    아이디 찾았다몽골모자 뭐에욬ㅋㅋㅋㅋㅋㅋ 덧글보고 한참 웃었네요.
    덕분에 생각난 몽골... 여행기나 찾아봐야겠습니다. 다음편 빨리 올려볼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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