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00:15

이탈리아 반짝여행 (2) 7시간 동안의 로마 └ 이탈리아 반짝여행 (2019)

* 사진은 누르면 커짐.


1. 판테온과 아침끼니

시차 적응 못하고 무지 일찍 일어났다.
오늘 오후에는 라이언 에어를 타고 팔레르모로 넘어간다. 그 전에 로마를 대충 둘러볼 생각이다.

멍한 정신이다보니 입맛도 없다.
어제 주인 아주머니가 걱정했던 이탈리안 스타일의 조식은 패스하기로 했다.

피라미드 역 근방에서 30번 버스를 타고 판테온 근방에서 내렸다.




로마의 아침은 게으르다. 사람이 없다.
로마 시내 여행의 스타트가 인적 드문 판테온이라니. 로마 시민들의 게으름에 감사한다.

만족감 속에서 판테온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썼던 적이 있긴 한데, 로마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물이라면 역시 판테온이다.

보통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스토리가 있기 마련인데 판테온은 별다른 썰 없이 그냥 좋다. 정면에서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는 그 구조가 몸살나게 좋다. 인간 대부분의 유전자에 '대칭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각인된 것 아니냐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아마 내 유전자도 그 대부분에 속하나보다.




지금 이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는 게 내 노트북이 아닌지라 심슨 얼굴이 없다.

신선한 아침공기와 판테온 앞의 멋진 나...♡ 컨셉으로 셀카 찍고 있는데
근처 카페의 직원 아저씨가 날 보고 씨익 웃으며 엄지 척 하고 들어갔다.

한 열댓장 찍고 있었는데 그만 찍으라는 소리 같아서 하하하 웃으며 핸드폰을 내렸다.
부끄러우니 커피나 마시러 가자.





1) 타짜도르 Tazza D'oro

판테온에서 가까운 로마 커피 일번지, 타짜도르. 워낙 유명해서 달리 할 설명도 없다.

https://goo.gl/maps/f9RWLEXavDNyEXyR9




판테온 광장에서 판테온을 마주보고 왼쪽 골목 라인 어딘가에 있다.
지난 여행들에선 타짜도르 근처를 지날 때마다 손님이 너무 많거나 그 전에 카페인을 과다섭취했거나 하는 이유로 가질 못했다.

이번엔 이른 아침이라 손님도 별로 없고, 뇌에선 카페인을 갈구하는 상태라 들어갔다.





에스프레소 0.9유로.

진한 커피향이 코를 먼저 훑었고 입에서 한바퀴 돌더니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커피가 식도를 지나 위장을 거쳐 세포 하나하나에 전달되는 느낌이다. 카페인이 나를 깨우고 있다... 또롱! enat님이 세상에 로그인했습니다.

역시 살아가기 위해선 카페인이 필요하다.
매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부팅시키니, 아마 내 피에선 씁쓸한 커피맛이 날거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가게 구경을 하다가, 친절을 휘두르는 영업왕 직원에게 걸렸다. 정말 영업을 잘하는군. 구입할 생각도 없었는데 사버리고 말았어.

모카포트(16.3유로)와 커피콩(6유로)이랑 커피콩 초콜릿(5유로) 2개씩 구입.
귀국 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2) 산 에우스타키오 Sant Eustachio il caffe

타짜도르와 쌍벽을 이루는 커피집. 여기도 워낙 유명한 카페라 달리 무슨 설명을 할까.

https://goo.gl/maps/B7UoCrqietC1wMbN7




판테온 광장에서 판테온을 마주보고 오른쪽 골목 라인에 있다.
광장에서 반블럭 정도 떨어져 있으나, 늘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에 찾기 쉬울 것이다.




여기선 모나첼라를 마셨다. 생크림이 몽글몽글하게 올라간 초코 커피다. 3.3유로.
이탈리아 커피치곤 비싼 편이긴 한데 달콤함의 집합체라 맛있게 잘 마셨다.

작은 커피콩 초콜릿(1.5유로)을 팔고 있길래 여러 개 사서 여기저기 돌렸다.
맛있다고들 하더라. 돌리고 남는 게 없어서 먹어보진 못했다.





3) Est Artigiani del Gusto

커피를 두 잔 마시고나니 위장이 음식물을 원한다.
근처에 문을 연 레스토랑이 있나 찾아보다가 이곳으로 향했다.

https://goo.gl/maps/Ce24Ap71mGRzRcy57




가게 이름은 Est Artigiani del Gusto.
딱히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치도 외진 골목길 중간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걸 보면 맛있는 집이긴 한가보다.
구글 평도 좋길래 고민 않고 들어갔다.




이왕 먹는 거 좋은 걸 먹자 싶어서 15유로짜리 아침('티파니의 아침'이란 메뉴였다)을 골랐더니 푸짐하게 나왔다.
아쉽게도 연어는 좀 짰다. 나머지는 합격점. 특히 계란의 몽글함과 부드러움이 장난 아니었다.

양이 많아 배가 무지 불렀다. 그래도 이 구성에 15유로는 너무 비싸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여기가 집이 아니라 접시를 핥지 않았다. 잘 참아냈어.





4) 지올리티 Giolitti

연어의 짠 맛을 가시기 위해 젤라또를 먹기로 했다.
근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젤라또 가게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로마의 아침은 참으로 게으른 것이다.

검색 기준을 오픈 시간으로 잡고 가게를 검색해보니 지올리티가 나왔다.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는 봤다. 가이드북마다 빠지지 않고 수록된, 무지 유명하다는 젤라또 집이다.

유명한 집이라 문을 일찍 여나? 기대하며 찾아갔다.

https://goo.gl/maps/GNCdtBwoih7je6ar5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여태까지 살면서 먹은 젤라또 중 제일 맛없었다.

콘 과자도 성의없었고 젤라또 자체도 성의없었다. 나는 '젤라또'라는 건 무조건 맛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 가게를 통해 깨달았다. 내가 원채 고르는 걸 못해서 맛없는 맛을 고른 건지도 모르겠으나...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여태까지 다른 가게에서 골라 먹었던, 맛나고 알찬 젤라또들은 다 뭐란 말야.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중간에 버렸다. 젤라또 중증 중독 환자인 내가 중간에 젤라또를 버릴 정도라니 심각한거다.
그동안 먹은 젤라또들이 얼마나 맛있는 젤라또였는지를 되새기게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 아침 동안 돌아다닌 가게들.







2. 폭우

지올리티 젤라또의 맛이 처참했던 덕분에 연어의 짠맛도 해소하지 못했다. 오히려 젤라또의 어설픔으로 인해 불쾌함이 늘었다. 스페인 계단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부른 배라도 달래보기로 했다.

근데 느닷없이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지금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어릴 적엔 나가놀지 못해서 싫어했는데, 여행 다니면서 빗속의 예쁜 추억들을 수집하는 통에 좋아졌다. 이를테면, 지난 겨울 로마에서 아침장 보던 추억, 쿠바에서 존과 함께 빈민가를 거닐던 추억, 앙헬라의 해먹, 르웨탄의 풀내음, 방콕의 100바트 레오와 프라하의 흑옥... 하여간 안 싫어한다.

그래, 싫은 건 아닌데... 이건 너무나도 느닷없이 퍼붓는 것이었다.

아침만 해도 맑았는데, 해뜸이었는데, 써니였는데.




방금 전까지 이랬다구!




왜 갑자기 여름철 장맛비!?

한낱 인간의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빗방울들은 내 뒷통수를 마구 가격했다. 야속한 녀석들...




혹시 몰라서 가방 속 깊숙한 곳에 우산을 넣어두긴 했다. 그걸 기억해내고 꺼내어 펼쳤다.
그런데도 걸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 비는 몹시 성이 나 있어서 우산을 써도 다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마 밑에서 어벙한 얼굴로 빗줄기가 약해지길 기다렸다.





3. 스페인 계단

10분 정도 지났나? 하늘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붓던 비가 멈췄다.

우산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고 빗줄기가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우산을 접었다.




이러다가 또 한바탕 쏟아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보시다시피 스페인 계단 쪽, 콘도티 거리.




스페인 계단에 도착하자, 날씨는 또다시 맑음, 해뜸, 써니가 되었다.

여기가 동남아였다면 스콜이었겠거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초겨울 이탈리아였는지라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11월의 이탈리아는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운가? 이제 막 깨어난 사람이 있다면 10분 전까지 폭우가 휘몰아치고 갔다는 것도 모르겠는걸. 그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뭐... 계속 비오는 것보단 낫지... 고맙군...




스페인 계단은 온통 젖어, 아까 내린 비가 헛것이나 꿈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비로 젖어있으니 계단에 앉을 순 없겠다. 그 덕분에 평소엔 젤라또 들고 사진 찍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스페인 계단이 여유롭고 한적했다. 비의 순기능이다.




내 엉덩이라고 자동 방수와 보온 기능을 탑재하고 있는 건 아니니, 슬슬 걸어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비온 후 맑은 스페인 계단과 나...☆ 따위의 컨셉으로 또 셀카 삼매경에 빠졌다.
사진 수를 세어보니 스페인 계단에서만 70장 찍었다.

Q. 왜 그랬어 나 자신?
A. 한 살이라도 어린 나를 많이 남겨두려고...




스페인 계단을 올라 왼쪽을 바라보자 희미한 무지개가 보였다.

무지개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





4. 핀초 언덕




스페인 계단 위쪽에서 길을 따라 왼쪽으로 쭉 가다보니 완만한 경사길이 나왔다.

지도를 찾아보니 경사길 위쪽은 보르게제 공원과 이어진 핀초 언덕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로마에 몇 번 방문했으면서 아직 보르게제 공원엘 가본 적이 없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가봐야겠다.




핀초 언덕을 오르다보면 Terrazza Viale del Belvedere라고 불리는 전망대를 지나게 된다. 나쁘지 않은 전망이다.

여기서 공원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보르게제 공원이다.




공원 내부를 향해 들어가려는데 전기 자전거가 보였다. 아까 구입했던 커피와 초콜릿도 들고다니기에 영 불편하고, 다리도 슬슬 아파오는데, 자전거를 타면 좀 편할 것 같다. 자전거 대여소에 가서 가격을 묻자, 뭐라뭐라 이야기를 해주다가 갑자기 운전면허증을 보여달란다.

...이건 비밀이지만, 사실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연습 면허로 도로 주행을 연습하다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소방용수를 터뜨려 침수차를 만든 전적이 있다. 소방관 분들 죄송합니다. 아버지께 겁나 혼난 이후로 운전대는 잡지도 않았고 그래서 면허도 없다.

하여간 전기 자전거를 타려면 무조건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한단다. 엄밀히 말하면 전기로 가는 차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럼 그냥 페달 밟는 자전거로 만족해야겠다. 내가 전기 자전거는 됐다고, 그냥 페달 자전거를 빌려달라고 하자, 자신들은 (그런 하등한 탈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페달 자전거가 없단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슬프게 몸을 돌렸다.




이 공원에 자전거 대여소 자체는 참 많다. 근데 문을 연 곳은 참 없다. 아까 입구에서 본 그곳을 제외하곤 어째 한 군데도 영업을 개시하지 않았더라. 오픈 시간이 많이 늦나 보다. 로마는 대체 얼마나 잠꾸러기인 거냐고.

투덜거리며 걷던 도중, 핀초 언덕에서 보르게제 공원으로 넘어가는 다리 앞에서 드디어 문을 연 자전거 대여점을 발견했다.





5. 보르게제 공원에서 자전거 대여

내가 발견한 노상 자전거 대여점은 두 명의 이탈리안 청년들이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이제 막 어슬렁어슬렁 나와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페달 자전거도 보유하고 있단다! 나는 기뻐하며 자전거를 대여하겠다고 했고, 주인들은 개시 손님이라며 환영했다.




운전면허가 없는 enat이 빌릴 수 있는 유일한 탈 것, 페달 자전거! 이 귀여운 민트색 자전거가 오늘 나와 함께 보르게제 공원을 달려줄 녀석이다. 많이 낡아보였지만, 굴러가는데엔 문제없어 보였다. 가격은 시간당 5유로.

보증으로 신분증을 맡기라길래 여권을 꺼냈더니, 청년들이 당황해하면서 다른 거 없냐고 묻는다. 학생증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여권을 보관하기엔 (심적으로) 무겁단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운전면허도 없는데... 혹시나 싶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더니 그거면 된다고, 그걸 맡기라고 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자전거를 빌렸다.

안장 조절하고, 브레이크 잡아보고, 페달 돌려보고. 이상 없는 걸 확인했으니 출발!




▼ 자전거 타면서 둘러본 보르게제 공원 사진.




왼쪽에 개미만한 사람이 보이시는지? 나무가 저렇게 크다.




길이 울퉁불퉁한 편이고, 비가 온 뒤라 물웅덩이도 좀 있는 편.

자전거가 낡아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민첩하진 않았다. 덕분에 신나게 흙탕물을 맞고 다녔다. 12살로 돌아간 기분.




윗부분을 지우개로 지운 것 같은 유적도 있고.




피크닉하기에 딱 좋은 잔디밭과 그루터기도 있고.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보르게제 미술관도 있고.

예약은 당연히 안해놔서 들어가보진 못했다. 난 내가 오늘 보르게제 공원에 올 줄도 몰랐다고.




공원에 있던 아기자기한 건축물과 뒤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 꼭 그림 같았다.




마침 비 온 뒤라서 풀내음과 흙내음이 짙었고, 공원은 자전거로 달리기에 충분히 넓었다. 여기는 시에나 광장이라고 불리는구나. 저기는 무슨 용도의 건축물일까? 여기는 보르게제 미술관이다. 저건 무슨 기념비지? 여기는 카페인 것 같은데. 저기는 영화 상영을 하는 곳인가봐. 읽을 수 있는 풍경과 읽을 수 없는 풍경들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고, 투명한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려왔다. 허벅지는 단단해지고 숨이 조금 찼으며 귀가 살짝 시려웠다.

보르게제 공원 진짜 멋지잖아!

이런 멋진 곳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한 나 완전 잘했어!

사실 한참 전에, 로마를 다녀온 친구에게 보르게제 공원을 추천받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산책하고 피크닉하는게 너무 좋았다고, 너도 꼭 가보라고 말이다. 그 때 난 로마까지 여행가서 무슨 공원엘 찾아가냐고 귓등으로 듣고 흘렸으나, 보르게제 공원은 나 같은 공원 비선호자에게도 압도적인 매력을 뿜는 곳이었다. 남들이 가라고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추천한다! 보르게제 공원에서 딱 한 시간만 시간을 내어 꼭 한 번 자전거를 타보시라!

완전 신난다고!





6. 포폴로 광장

시간은 흘러흘러, 이제 반납할 시간.

자전거 대여소의 청년들이 내게 즐거웠냐고 물었고, 나는 더할 나위 없었다고 답했다. 주민등록증을 돌려받고, 간만에 페달을 밟아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어가며 길을 걸었다.

갑자기 세상이 느려졌어. 이 굼벵이 같은 속도에 적응이 되질 않는걸.




이제 슬슬 역 근처로 가야겠다 싶어서 포폴로 광장 쪽으로 걸었다.

이곳은 포폴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Terrazza del Pincio. 위에서 바라보는 포폴로 광장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그 와중에 찬란한 하늘. 눈부시다. 썬글라스 가져올 걸 그랬다.




위 전망대에서 잘 찾아보면 포폴로 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길을 따라 내려갔다. 솔직히 어떻게 내려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전거를 열정적으로 타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것 같다. 쩝.

그거 하나 기억난다. 포폴로 광장을 홀린 듯 바라보며 걸었던 거. 솔직히 포폴로 광장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 쌍둥이 성당빨이라고만 생각했다 - 이 각도에서 바라보니 작은 원형 경기장처럼 둥글둥글하니 아름다운 맛이 있었다.




광장 오른편에선 비누방울 공연을 하고 있었다. 페달을 돌리느라 애쓴 나의 근육과 관절들이 삐걱거리는 통에,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용케 터지지 않은 비누방울 몇몇이 내게 천천히 다가오다가 사라졌다.





하늘이 열리는 포폴로 광장.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태까지 본 포폴로 광장 중 가장 환상적이었다.

포폴로 광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성당 종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고, 비둘기 떼가 그 소리에 놀라 동시에 날아올랐으며, 비누방울 장인의 비누방울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태양은 압도적인 무대 위의 조명이었고, 구름은 훌륭한 반사판이었다. 나는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지경이 되어, 사후세계가 있다면 죽었을 때 이런 식으로 환대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몇 십초의 짧은 종소리가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디 잠깐 다른 세상을 엿보고 온 기분이다. 나만 느끼기엔 너무 아쉬운 걸.




광장 분수대 옆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나는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걸.

현실 복귀로는 역시 먹을게 최고다.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움직일까 하다가, 시계를 보니 공항가서 먹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쉽진 않다. 오늘 로마에서 할 거 다 했다. 커피, 아침, 판테온, 폭우, 스페인 계단, 무지개, 보르게제 공원, 자전거, 포폴로 광장... 7시간 동안의 로마.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도 진득한 포만감을 느끼며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 낮 동안 돌아다닌 포인트.







7. 공항으로

지하철 타고 숙소가 있는 피라미드 역까지 왔다.




하룻밤 머물렀을 뿐이지만 익숙해진 미니 피라미드 정경.




원래 숙소 체크아웃 시간은 정오 즈음이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 짐을 맡겨놨다가 오후에 찾으러 가도 되겠냐고 하자 그냥 체크아웃을 늦게 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고장내지 않았으니 내가 퍽 마음에 드셨는가보다.

덕분에 샤워실 한 번 더 쓰고 나왔다. 말끔해진 상태로 짐을 들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번엔 지하철이 아니라 기차역 오스티엔세로 가서 레지오날레(지역 열차)를 탔다.


▼ 숙소 근처 지도.




레지오날레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피우미치노 공항 3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제 라이언 에어를 타고 팔레르모로 간다.

앱으로 우선 체크인을 해놓은 터라, QR 코드 찍고 짐만 드랍했다. 국제선은 보딩패스를 별도로 프린트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국내선이라 종이로 된 보딩패스는 없어도 되나보다.





8. 라운지에서

짐 맡기고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왔다. 슬슬 끼니를 때우긴 해야겠다.




공짜 밥을 먹기 위해 라운지로 갔다. 이걸 위해 내는 신용카드 연회비라고.




창가 자리를 잡고 이거저거 잔뜩 받아와서 먹었다. 맛은 그냥저냥.




허기를 달래고 나서야 풍경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탑승까진 한 시간 정도. 아직 충분하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일기를 썼다.




돈도 없는 새끼가 무슨 사치꾼...

나는 자신이 쓴 글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다가, 음식을 한 번 더 가져오기 위해 펜을 내려놓았다.





사치꾼 enat의 여행기는 팔레르모의 밤에서 계속!







덧글

  • 우레 2020/03/01 09:19 # 삭제 답글

    여행 중 카페 밖 경치 즐기기가 사치하다는 표현에 공감이 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에 더, 격하게 몸 떨면서 공감합니다.
  • enat 2020/03/06 10:34 #

    돈 많이 들여 온 여행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내가 일케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는 그 짜릿한 감각이 있죠 ㅋㅋㅋㅋ 크 내가 바로 프로사치꾼!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냥 돈 자체가 많았음 좋겠는게 사람의 마음이쥬... 흑흑...
  • 가녀린 펭귄알 2020/03/01 20:18 # 답글

    보르게제공원 안가봤는데, 다음에 로마에 가게된다면 가보고싶네요^^무엇보다도 저도 포폴로광장에서 환대해주는그런기분 다른곳에서라도 받아보고시퍼요ㅋㅋㅋ뭔지알아요그기분
  • enat 2020/03/06 10:31 #

    보르게제는 로마에 한 달 정도 살 수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씩은 꼭 피크닉 가고 싶은 공원이었어요! 필수코스는 아니지만, 돌 많은 로마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네요 ㅋㅋ
    그쵸 그 환대의 느낌 아시죠! 요새는 여행을 못가서 환대받는 감각을 못느껴 슬픕니당 ㅠㅠ 코로나 워이워이
  • 雪夜 2020/03/05 00:03 # 답글

    enat님 저 결국 4월말 이태리 일주 여행 취소했어요 ㅠㅠㅠ enat님 시칠리 포스팅 보고 기대도 되고 작년 가을부터 짠 여행이라 기대가 나름 컸는데,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는 것도 민폐고 가서 돌아와도 민폐고... 마음은 비웠으되 비운게 아니네요ㅠㅠ 항상 포스팅 너무 재밌게 잘 보고 있어서 친숙한 마음에 넋두리를 해봤습니다.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 주세요 ㅎㅅㅎ
  • enat 2020/03/06 10:28 #

    아이구 ㅠㅜ 시국이 시국인지라 ㅠㅠ 제가 다 속상하네요. 가을부터 짠 여행인데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겠어요 토닥토닥. 근데 이탈리아도 난리났더라고요. 정확히는 확진 검사를 열심히 하는 거겠지만... 여튼 여행 취소되어서 저두 속상합니다 ㅠㅠ 넋두리를 달리 어디에 하시겠어요 뽐뿌 드린 여기다 계속 하셔도 됩니다 ㅋㅋ 빨리 사태가 진정되길 바래야쥬!
  • blue snow 2020/03/06 12:54 # 답글

    글을 참 잘읽히게 재밌게 쓰시는 것 같아요 ㅎㅎ 옆에서 같이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ㅋㅋㅋㅋ중간중간 담백한 웃음 포인트가 있는 것도 넘넘 좋아요ㅋㅋㅋ 언능 다음 여행기가 올라오길 기대합니다!!♥♥
  • enat 2020/03/06 21:02 #

    미래의 제가 읽고 즐거워할수 있도록 쓰고 있습니다. 함께 여행하신 느낌이라니 제가 다 감사하네요. 재밌게 읽어주시다니 넘나 감사드립니다.
    음 제 블로그가 게으른 여행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하지만... 노력할게요! 이얍!
  • 존평씨 2020/03/06 17:59 # 답글

    enat이란 여인이 있음에 기갈이 들어 구굴의 인도를 받으니 그곳은 로마의 골목이라
    이에 이르러 음식을 먹으니 만족하되 다만 연어가 짜더라
    여인이 일전에 왔던 일로 생각함에 젤라또를 먹으리라 하였으나 만족치 못하니 주여 어찌 하오리까 하더라
    이에 주님이 가엾이 여겨 비를 내려주시니 이는 여인이 아직 짠맛에 힘겨워함이라
    주님이 천사에게 이르되 많이 내리게 하라 이는 여인을 위함이라 하였으나 여인이 마시지 않음에 탄식하시더라
  • enat 2020/03/06 21:02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런 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에요?
    아니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베네치아 괴담덧글도 가끔씩 우울할 때 찾아서 보는거 아시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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