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2 03:50

쿠키를 구웠는데 조약돌이 되었다 일상

무지무지 심심해서 쿠키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베이킹을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초딩 때 책으로는 많이 봤다. 당시 아빠 친구분이 서울문화사에서 일하셨었는데, 나와 언니에게는 아이큐점프와 밍크, 윙크 등등의 만화잡지를, 엄마에게는 우먼센스, 리빙센스를 비롯한 생활잡지를 매달 선물해주셨었다. 가끔씩 잡지 부록도 가지고 오셨는데 2할이 인테리어책, 8할이 요리책이었다. 근데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인테리어나 요리엔 관심이 없어서 그 책들은 모두 내가 봤다. 처음엔 버려진 책들이 불쌍해서 봤었지만 나중엔 사진과 그림이 예뻐서 보고 또 보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미적 감각은 모두 이 때 생긴 듯.

하여간 베이킹은 그 때 요리책으로 접했던 기억이 전부다. 당연히 만드는 법 따위 지금에 와선 1도 기억 안난다. 옛부터 나는 빵이고 쿠키고 먹을 줄만 아는 애였다. 그렇지만 어릴 적의 나는 요리책 앞에서 '재료와 기구만 있으면 금방 하겠는걸'이라고 늘 생각했기에 (그러나 그 재료와 기구 살 돈이 없었지),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쉽게 느껴졌다. 그냥 재료 휘적휘적하고 굽기만 하면 되잖아?

그리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쿠키가 아니라 조약돌을 만들었는데... 여튼 시작한다.

 




재료.

쿠키 만들 땐 박력분을 쓴다고 해서 쿠팡에서 샀다. 버터도 쿠팡에서 샀다. 계란은 동네 마트에서 샀다. 설탕은 원래 있던 거.






박력분을 보울에 부었다. 나는 계량 같은 거 모른다. 걍 와르르 부었다.

저 보울은 1년 전 회사 대표님이 어디 모임가서 상품으로 받은 건데, 자기는 필요없다고 복귀하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나한테 준 보울이다. 사진으론 티가 안나는데 부피가 엄청 커서 자리 겁나 차지한다. 쓸모 없는 거 떠넘긴다고 지대 궁시렁거리면서 받았는데 결국 이렇게 쓴다. 고맙... 고맙... 고맙진 않다.






버터를 넣는다. 그냥 적당히 칼로 잘라서 넣었다. 그리고 5초간 생각했다.

이러면... 어떻게 반죽을 한담. 이렇게 고체 상태로 넣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다시 건져서 전자레인지로 녹인 다음에 투입하기로 했다.






계란 2개와 녹은 버터를 투입했다.

원래는 계란 노른자만 쓰는 거라는데 귀찮아서 전부 넣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설탕을 넣었다.

설탕 무지 많이 넣어야 맛있다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아꼈다. 지금은 후회 중이다. 열받으면 아이스크림 퍼먹는 주제에 건강은 무슨.






반죽을 시작한다.

비닐장갑이 없어서 비닐봉투로 이챠이챠 주물렀다.






좀 주물럭거리니 요래 됨.






절반은 다른 색깔을 넣고 싶다.






그래서 절반 떼어서 믹스커피가루 넣었는데 많이 모자랐다. 다음엔 아예 초코가루나 녹차가루 같은 걸 구해놔야겠다.






반죽 완성. 이대로 냉장고에 1시간 동안 숙성했다.

기다리는 사이에 또 너무 심심해서 티라미수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써보겠다.






1시간 후 반죽을 꺼내서 이렇게 저렇게 쿠키 모양으로 빚어보았다.

반죽이 원채 많아서 빚고 빚다가 지쳐버렸다. 사진에 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왼쪽 그릇에 보이는게 원래 1빠로 시험삼아 구웠던 건데 깜빡하고 사진 못찍어서 2번째 빚은 거 찍은 거임.






쿠키 모양으로 빚은 녀석들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180도, 15분.

저 에어프라이어는 자주 다니던 미용실에서 경품으로 받은 기기다. 미용사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서 선결제하고 자주 갔었는데 여초회사 못 견디고 나갔는지 저번에 가니까 퇴사했다고 한다. 안녕, 잘생긴 미용사 선생님. 에어프라이어는 잊지 않을게요.






15분 끝. 고소한 냄새가 난다.






냄새에 속았다. 맛 좀 보려고 한 입 깨물었는데 경도가 어마어마하다. 이빨 빠지는 줄 알았다. 나는 박력분으로 조약돌을 만들어내었다.

반죽이 문제인가, 공정이 문제인가, 둘 다 문제인가. 고민하다가 남은 반죽 돌릴 땐 에어프라이어 설정을 160도 10분으로 바꿔보았더니 사람이 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식감은 별로다. 너무 꽉 찬 밀가루 느낌이다. 이건 반죽의 문제 같다. 다음에 반죽할 땐 비율에 더 신경쓰고 다른 걸 첨가해야 할 것 같다.









연성한 조약돌 쿠키.

넘나 많지만 맛없어서 못 먹겠다. 남친 주고 와야겠다.



끗.




덧글

  • 라비안로즈 2020/05/22 07:37 # 답글

    밀가루가 너무 많았네요.

    먼저 반쯤 녹인 버터와 설탕을 섞어서 약간 뜨거운 물에 중탕으로 설탕이 어느정도 녹을때까지 (버터는 다 녹으면 안됩니다) 크림 상태로 만드는데 설탕과 버터의 비율이 1:1이면 많이 달고 설탕은 버터보다 한 70프로의 비율로 넣으면 됩니다. 그다음 밀가루를 넣는데 밀가루를 설탕의 양보다 10프로 더 넣어서 일단 너무 주무르지 말고 적당히 밀가루의 가루가 안보일 정도로만 살짝 섞어서 냉장고 휴지했다가 구워야 되는데 그냥 구워도 되고 휴지해서 구워도 되고 합니다.

    굽기 전 에어프라이어를 10분간 돌려서 예열한 상태에서 돌러야되고 온도는 대충 170도거나 그정도 돌리면 되고 한 6분?에서 10분.. 중간중간 상태를 봐야합니다.

    야매 쿠키굽기의 설명이었습니다.
    제가 설명드린건 퍼지는 쿠키라 퍼지는 쿠키 싫어하시면 밀가루를 조금만 더 넣고 하시면 됩니다.(버터:설탕:밀가루 = 1: 0.7: 0.8~0.9정도)
  • enat 2020/05/22 08:32 #

    우와!!!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해볼게요!!!
  • 라비안로즈 2020/05/22 09:35 #

    근데 버터양이 좀 많기 때문에 이쁜 모습은 안되고 약간 퍼진 모양으로 나올꺼예요. ^^;; 먹는데만 치중한 쿠키 레시피입니다. ㅋㅋ;;
  • enat 2020/05/22 10:13 #

    사실 모양은 상관없으나 ㅋㅋ 함 버터양을 줄여가면서 해볼게용 ㅋㅋ
  • 바이올레타(레타) 2020/05/22 08:30 # 삭제 답글

    아앗.. 아앗.. 쿠키, 특히 박력분 들어가는 쿠키는 주물주물하시면 안돼요 !! ㅠㅠㅠㅠㅠ 주걱으로 가루가 보이지 않을만큼만 섞으셔야 합니다 ㅠㅠㅠㅠ 버터는 레시피마다 사용법이 조금씩 다를거같은데 보통 실온에 30분에서 한시간동안 두셨다가 말랑해졌을때 사용하시는게 좋아요 다른건 몰라도 베이킹은 레시피 참고해서 하시면 훨씬 쉬울거예요!
  • enat 2020/05/22 08:33 #

    그래서 돌덩이가 된 거였군요... ㅋㅋㅋㅋㅋ 다음엔 성공해볼게요!!!
  • blue snow 2020/05/22 10:08 # 답글

    베이킹에서는 계량이 중요한걸로 알고있어요..!!
  • enat 2020/05/22 10:18 #

    계량하는게 회사 업무라 집에서도 하기는 싫... 오늘은 국자로 비율 재가면서 해보죠!!
  • thyme 2020/05/22 10:43 # 답글

    아우 오늘 일하다 말고 이거 읽고 정말 많이 웃었어요! :-) 반죽에 대한건 다른분들이 많이 이야기 하셨으니까... 모든 쿠키는 오븐에서 바로 나왔을때 말랑말랑 건드리면 막 부서질 것 같아야 해요. 식으면서 오버베익 된건 딴딴해지고 적당히 구운건 적당히 쫄깃하거나 부드럽게 식거든요. 막 구웠을때 뒤집개가 아니라 손으로 잡아 올릴 수 있을 정도면 백프로 너무 구운....;;; 다음에는 살짝 굽는 시간도 조정해서 보드라운 쿠키를 만들어 보시길 바래요!
  • enat 2020/05/22 10:47 #

    에어프라이어에서 꺼냈을 때 해안가의 자갈돌처럼 굴러다니던데 너무 구운 거였군요!!! 꿀팁 감사드립니다!!!
  • 존평씨 2020/05/22 13:28 # 답글

    우와~ 연석술사님이시다!!!
  • enat 2020/05/25 14:03 #

    지금 그 돌덩이를 아그작아그작 먹고 있네요 후후...
  • 레아 2020/06/02 22:52 # 삭제 답글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돌덩이를 만들고 계셨군요.....?
  • enat 2020/06/06 15:05 #

    앗 아니... 계획은 쿠키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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