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2 13:55

이탈리아 반짝여행 (4) 팔레르모 아침 산책 └ 이탈리아 반짝여행 (2019)

1.

팔레르모의 새벽.

동네 양아치들의 소란에 깼다. 물론 양아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술김에 소리를 지르는 것일 뿐인, 평소엔 선량한 청년일지도 모른다. 뭐 어느 쪽이든 짜증난다.

잠결에 창문 열고 소리지를 뻔 했지만 - 개 짖는 소리 좀 안나게 해라! 같은 - 저들이 선량한 청년도, 단순한 양아치도 아닌 마피아에 소속된 어둠의 사람들(?)이면 어떡하나 싶어서 관뒀다. 나는 연약한 소시민이고 여기선 말 안통하는 여행자에 불과하니.





청년들의 소란을 애써 멀리하며 유튜브로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놓았다. 커피 한 잔 하면 딱이겠는데. 그러고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주방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다.

주방으로 가서 요래저래 조작하니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었다. 이 깊은 새벽과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잠들어있을 시간에 - 어둠의 청년들 빼고 - 일어나 있는 건 기분 좋다. 딱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거나 효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보너스 시간을 얻은 느낌이라 그런 것 같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어떻게 보내든 내 맘이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지도를 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사진을 찍다가... 하다보니 어느새 잠들었나 보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더니 주변이 벌써 환해져있었다. 거실 창 밖을 내다보니 시끄럽던 어둠의 청년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광장의 어둠 역시 아침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나버렸다. 밝아진 팔레르모의 시내는 시차적응 못해서 아침잠이 달아난 여행자에게 군침 도는 볼거리로 다가왔다. 산책이나 할까.

적당히 외출 준비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2.

호기롭게 밖으로 나온 것은 좋으나,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잘 모른다. 어젯밤 막 도착한 초짜일 뿐이다.




처음 온 도시는 사람들 많은 대낮에 둘러보는 게 편하다. 그래야 인파를 따라서 움직일 수 있고, 거리의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쉬우며, 가게들도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고, 길을 잃어도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고, 거리에 사람이 없거나 있어도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 뿐이다. 한 두어시간 더 쉬다가 나가는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러기엔 내 정신이 넘나 말똥말똥하고 초롱초롱했다. 정신이 외친다. 팔레르모! 빨리 팔레르모! 어서 팔레르모!

아까 새벽에 에스프레소 마시며 지도를 좀 봤는데, 그 덕분에 큰 건축물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안다. 큼직한 스팟들 위주로 다니다보면 감이 오려나. 한번 쓱 걸어봐야겠다.





3.

팔레르모의 아침 산책.


* 동선 : 마시모 극장 → 카포 시장 → 팔레르모 대성당 → 콰트로 칸티 → 쪼꼬미 두 성당






1) 마시모 극장 Teatro Massimo

마시모 극장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극장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극장이다.

어디서는 3대 극장이라 하고, 어디서는 4대 극장이라 하는데, 선정하는 사람 마음이겠지. (선정단(?) 같은 게 있다면 그 중에 시칠리아 사람이 있을 경우 마시모 극장을 3대 극장으로 넣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영화 '대부' 3편에서 알 파치노의 마지막 절규를 찍은 배경이 바로 이 극장이라고 한다.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그 딸을 잃은 아비의 절규는 워낙 유명한 장면이라 알고 있다.




내부에 들어가서 둘러도 보고, 공연 일정도 물어보고 싶은데 이른 아침이라 문도 닫혀있고 조용하다. 나중에 문 열면 다시 와서 우아하게 공연을 골라보리라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이후에 나는 우아하게 공연을 고르기는커녕 화장실이 급해서 허겁지겁 뛰어들어갔지만... 뭐 다음날의 일이다.





2) 카포 시장 Mercato il Capo

팔레르모에는 유명한 전통 시장이 많다. 발라로 시장, 부치리아 시장, 카포 시장 등등.

유럽에서 '하나님의 부엌'이라고 불릴 정도로 풍부한 식재료가 넘치는 시칠리아인 만큼, 시장에서는 시칠리아가 자랑하는 과일, 채소, 고기, 해산물 등 양질의 식재료를 만날 수 있다.




그 중 여기 카포 시장은 마시모 극장 뒤쪽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가끔씩 그 큰길가에 작은 규모의 벼룩시장이 함께 열리니, 길을 잃을 것 같으면 벼룩시장을 찾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시장답게 신선한 식재료가 주 품목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파스타면, 쨈, 페이스트 등) 위주로 파는 업체도 꽤 있다.





이곳은 아침장이 유명하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였다.

새벽에 여는 한국의 도매시장들을 떠올리며, 이 시간대면 슬슬 닫겠구나 싶었는데, 정작 가서 보니 이제야 오픈을 하고 상품 배치를 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으음, 한참 잘못 생각했군. 여긴 소매시장이니.




이제 막 문 열고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뭐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아직 산책 중이라 양손 가득 짐보따리 만들 생각도 없고.

그냥 눈으로 구경만 하며 지나갔다.





3) 팔레르모 대성당 Cattedrale di Palermo

팔레르모 대성당은 시칠리아 왕국 시대에 지어진 대성당이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확실히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본토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걸 느꼈는데, 그걸 가장 크게 느낀 곳이 바로 이 팔레르모 대성당이다. 아랍 양식이 혼합된, 코란 구절이 적혀있는 대성당이라니.

시칠리아는 지리적, 군사적, 사회적인 이유로 많은 나라에서 탐을 내는 곳이었고 - 옛날부터 유럽의 곡창지대, 하나님의 부엌이라고 불렸다니 말 다했다 - 그 때문에 지배세력이 로마,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으로 계속 달라져왔다.

그 중 지배세력이 타 문화권에 대해서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던 시기가 있었으니, 바로 노르만 왕조가 세운 시칠리아 왕국 시대다. 아랍 통치 이후 들어선 노르만 왕조는, 이전 문화에 대한 탄압 대신 함께 어울리기를 선택했고, 그러한 문화의 융합으로 탄생한 걸작이 바로 이 팔레르모 대성당이다.

(시칠리아 왕국은 융성하여 나중엔 나폴리 지역까지 흡수하였다. 몇 년 전 나폴리 남부 쪽을 돌 때 봤던 아랍권 양식의 건물들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혼재된 양식을 가진 대형 건축물들은 대개 평화를 상징하기에 좋아하는 편이다.

상대 문화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나올 수 있는 건축물이니.




대성당 옆에는 학교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타 문화에 배타적이었다. 특히 시칠리아 왕국이 있던 시기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종교 전쟁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 문화의 화합과 조화로 지어진 대성당 옆에서, 학생들은 공존을 배우겠지.





4) 콰트로 칸티 Quattro Canti

구시가지의 중앙, 사거리에 있는 건물 모서리 벽면을 원주형으로 깎아 아름다운 조각과 작은 분수로 꾸며놓은 곳이다. 단순한 사거리를 관광지로 만들어버린 기획자와 설계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콰트로 칸티를 중심으로 서쪽은 팔레르모 대성당, 북쪽은 마시모 극장, 남쪽은 팔레르모 중앙역, 동쪽은 바다와 항구가 있다.





이곳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찰들이 순찰 중인 곳이다. 어찌보면 가장 안전한 곳일지도.





5) 쪼꼬미 두 성당

콰트로 칸티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산타 마리아 델 암미랄리오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mmiraglio)과 산 카탈도 성당(Chiesa di San Cataldo)이 붙어있다. 이름이 어려워서 나는 그냥 쪼꼬미 두 성당이라고 불렀다.




돔과 창, 탑을 보면 아시다시피 아랍 느낌이 강하다. 팔레르모 대성당처럼 쪼꼬미 두 성당 역시 다양한 양식이 혼재된 성당이다.

내부에 들어가봄직도 괜찮았을 텐데, 당시의 나는 다리가 아파 그냥 지나쳤다. 이제야 아쉽네.





4.

구시가지 한바퀴를 쭉 돌고 나서야, 동네 사람들이 슬슬 보이더라.

시간은 아침 9시. 팔레르모의 하루는 아침 9시는 지나야 시작되나보다.




끼니를 때울 겸 길거리 음식을 사먹었다.

하나는 깨가 잔뜩 붙은 따끈따끈한 치즈 야채빵, 하나는 시칠리아의 달달한 디저트 카놀리였다.




치즈 야채빵은 일기장에 '고로케 하위버젼'이라고 쓰여있다. 튀긴 빵이 아니어서 고로케보다 맛이 약하니 그리 느껴진 것 같다.

가격은 1.2유로. 가게 할아부지가 친절했다.




카놀리는 젊은 알바생이 팔고 있었는데 불친절했다. 인종차별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모두에게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저러면 본인이 제일 힘들텐데. 여튼 재료와 레시피가 좋았는지, 친절이란 감미료가 첨가되지 않았어도 맛있었다. 먹다보니 과자가 너무 달아서 크림치즈의 고소한 맛을 가리던데, 크림치즈의 맛을 더 센 걸 고르고 토핑을 더 강한 걸로 올리면 어울릴 것 같다.

가격은 2.5유로.

둘 다 심심한 입을 달래기엔 딱 좋았다.





5.

시칠리아 왕국 시절의 건축물을 제외하더라도, 구시가지의 전반적인 느낌 역시 본토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도로가 비교적 넓고, 건물도 보다 새 것이었는데, 그런 점은 꼭 남미 같았다.

남미, 그러니까 스페인의 식민지처럼, 외부 세력이 이전에 있던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계획적으로 다시 세운 듯한 느낌이 있었다.




당시엔 그냥 느낌이 좀 그렇네 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실제로 여기 시칠리아는 스페인이 몇 백년 간 통치했던 역사가 있고, 그 통치 기간동안 화산 폭발과 지진이 일어나 시칠리아 섬의 중부~남동부쪽 도시를 재건했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팔레르모는 지진피해 집중지역에선 벗어나긴 하지만, 그리 재건을 많이 했던 시기라면 여기도 그 때 얼추 재정비 했겠지 싶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나? 그냥 짐작 뿐이다. 나중에 도서관 열리면 책 찾아봐야지.





6.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마그네틱을 하나 산 뒤, 다리가 쑤시길래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요새 잘 안걸어다녔더니 오래 걷질 못하겠네.




중간에 대형마트가 있길래 들러서 먹을 걸 이것저것 샀다.

샐러드용 야채, 프로슈토, 방울 토마토, 트러플 페이스트, 쥬스, 우유 등등. 이것저것 고르다보니 생각보다 봉투가 무거워졌다. 시장에서 사는 건 좀 긴장되는데 마트는 만만해서 이것저것 다 집어들게 된다. 전형적인 현대인이로군.

양손에 장 본 물품 가득 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겨우 한 두시간 걸어다닌 건데 생각보다 피곤하다.

한숨 눈을 붙였다가, 다시 일어나야지.




체팔루에서 계속!






덧글

  • 2020/10/05 03:0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enat 2020/10/11 19:06 #

    안녕하세요! 너무 반갑습니다! 조금 있으면 서로 알게 된 기간 동안에 강산이 한번 바뀌겠군요.
    그동안 엄청나게 국제적으로 위치가 달라지셨네요! 정신없이 바쁘셨을 와중에 제 꼬꼬마 시절부터 지금까지 실시간으로 봐주시고 여태까지 계속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친구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ㅋㅋㅋ 7년이라니 감사한 인연입니다.
    일 때문이든 여행 때문이든 혹여 미국에 가게 된다면 글 꼭 올려서 근처라고 알릴게요! ㅋㅋㅋㅋ 요즘 같은 시기에 코로나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 레아 2020/10/05 03:01 # 삭제 답글

    참 당황스럽게도 비공개 덧글로 달으니 저도 제가 쓴 글을 볼 수가 없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이글루스 가입 해야되는건가...
  • enat 2020/10/11 19:07 #

    이글루스가... 그렇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까먹으셨을까봐 알려드린다면 직접 보실 수 없는 윗 덧글은 넘나 반갑고 감사한 내용입니다! ㅋㅋㅋㅋ
  • 레아 2020/12/03 12:11 # 삭제 답글

    오랜만에 다시 들어와 어디에 댓글을 달았나 열심히 찾았는데 반가운 댓글이 >< 감사해요 ! 저는 또 그 동안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디씨 옆 버지니아로 이사했어요 ! 한동안은 여기 있을 듯 하니 혹시나 디씨 쪽 오신다면 꼭 알려주세요 저도 친구가 많이 없는데 ㅋㅋㅋㅋ 7년이나 온라인으로 뵙다보니 저에게도 감사한 인연이예요...! 이낫님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여행 많이 다니시고 글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진득히 계- 속 올려주세요 !!:D
  • enat 2020/12/13 00:48 #

    아앗 역시 국제적으로 다니시는 분... 그새 이사를 하셨군요!
    백신도 나왔으니 코로나도 몇개월 안짝으로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바다 건너 갈 일이 생기면 꼭 알려드리겠습니당!!
    이제 얼마 안남았으니 레아님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저희 꼭 살아남아요 이 시국!!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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