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4 21:18

이탈리아 반짝여행 (5) 무임승차 벌금 ├ 이탈리아 반짝여행 (2019)

1.

1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더니 하늘이 새파랬다. 햇살이 눈부시다.




뭐야? 아침엔 완전 흐렸는데. 날씨 무지 좋다!

이런 날씨엔 바다다, 바다가 예쁜 동네엘 가자!

기분파 여행자 enat은 기꺼이 일정을 변경하여 체팔루에 가기로 했다. 사실 체팔루는 다음날 가려던 곳이었지만, 이렇게 날씨가 좋다니 어쩔 수 없다. 내일 또 이렇게 하늘이 맑을지, 아니면 비가 올 지 모르는 거니까!





2.

체팔루는 팔레르모에서 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예쁜 마을과 천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어서, 시칠리아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이 꼭 들리는 곳이라 한다.




차가 있다면 편하게 갔겠지만, 뚜벅이 여행자 enat은 기차를 타야만 했다.

만약 내가 계획대로 움직였더라면 기차 시간을 미리 알아보고 중앙역에 갔을 거다. 하지만 이건 눈부신 하늘 때문에 발생한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운 출발이었고, 그래서 운송수단의 타임테이블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태평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구글로 열차 시간을 검색한 건 숙소에서 중앙역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자, 몇 시 열차를 타면 좋을까?




계획의 소중함이란 이런 것이다.

열차는 15분 뒤 출발하는데, 중앙역과 내 숙소는 1.1km, 그러니까 도보로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다음 열차 시간을 찾아보니 1시간 10분 뒤였다. 1시간 10분 뒤의 열차를 탈 지, 15분 뒤의 열차를 탈 지, 선택해야 했다. 어쩐지 15분 뒤의 열차를 포기하긴 아깝다. 애써 외출 준비한 것도 아깝고, 겨울이라 해도 빨리 질 테고, 왠지 지금 달리지 않으면 하루종일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 같았다. 그 때 뛰었으면 좀 더 보는 건데, 그 때 뛰었으면 좀 더 먹는 건데, 등등으로.




그래서 달렸다.

아직 이렇게 달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달렸다.





3.

헐떡이며 중앙역에 도착했으나 열차 출발 시간까지 1분 밖에 안 남았다. 진짜 노력해서 달렸지만 체력이 옛날 같지 않았나보다. 시간을 전혀 줄이지 못했다. 하긴 직선 거리가 1.1km였을 뿐, 신호등 때문에 기다리거나 길을 돌거나 하기도 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다.

1분이면 달려가서 열차에 올라타기도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여태까지 뛴 게 아까우니 그냥 달리기로 했다. 표를 살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탈리아 열차엔 예전에도 벌금을 낸 적(펀칭 안했던 피렌체-아씨시 구간 링크)이 있었는데. 나는 왜 자꾸 트랜 이탈리아에 불명예스러운 돈을 뿌릴 상황에 빠지는 걸까.

...

그치만 벌금이야 내면 그만이지. 택시비라고 생각하자.

무슨 정신으로 플랫폼까지 뛰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열차까지 뛰어가 안으로 골인했다.




내가 열차에 오르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타... 탔다! 진짜 탑승했다!

진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좌석에 앉지도 못하고 문 바로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헥헥거렸다. 뭐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린 거야? 이 정도로 달렸으니 체팔루엔 부모의 원수나 로또 번호, 세기의 비보라도 숨겨져 있어야 한다. 없으면 억울할 거야.





4.

마침 내가 탄 문 앞엔 까만 곱슬 머리의 예쁘장한 승무원이 있었다. 승무원은 내 기쁜 얼굴과 헐떡이는 숨을 보곤 안쓰러운 미소로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 열차를 타고 체팔루에 갈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승무원에게 답했고, 승무원도 함께 기뻐해줬다.

그러고보니 열차표 못 산 걸 얘기해야 하는데.

나는 승무원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며, 혹시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승무원 왈.

승무원 : 오, 안돼! 무임승차의 벌금은 50유로야!

라며 본인이 더 놀라는 것이었다.

팔레르모에서 체팔루까지 열차 요금이 5유로 정도 되는데, 벌금이 50유로라면... 10배 값이군. 생각보다 비싸지만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 - 500유로라던가 - 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열차에 탔잖아. 1시간 10분의 시간을 50유로로 샀다고 생각하지 뭐. 난 어쨌든 기차에 타서 기쁘다고, 체팔루에 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고, 승무원은 그런 내 모습을 측은하게 보다가, 품에서 규정집으로 보이는 미니북을 꺼내어 쭉쭉 읽어나갔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승무원 : 5유로, 벌금을 5유로로 하자!

승무원 왈, 자신이 승객에게 표를 끊어줄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이 있는데, 그 중 제일 낮은 벌금이 5유로라고, 자신이 그걸로 벌금을 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미안하다고, 규정이라 벌금을 매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니? 나는 50유로를 낼 생각이었어. 완전 땡큐한데!?

나는 고맙긴 한데 혹시라도 이렇게 일처리 했다가 혼나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그 승무원은 걱정하지 말라며 내게 표를 끊어줬다.




그래서 팔레르모-체팔루의 원래 요금 5.10유로와 벌금 5.00유로를 합친 10.10유로를 카드로 결제했다.

벌금이 줄어든 것보다도 승무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어놨던 일이다. 아마 이 마음을 받기 위해 그렇게 달렸나보지.

체팔루까지는 1시간 정도다. 쉬면서 가야겠다.





더 쓸려다가 넘 졸려서 다음에 진짜 체팔루에서 계속!





덧글

  • 타누키 2020/10/14 21:37 # 답글

    오오 좋은 승무원이셨네요~
    신기한 경험담입니다. ㅎㅎ
  • enat 2020/10/23 22:50 #

    벌금 왕창 물리는 승무원 만나면 고생한다는데 다행이었어요! ㅠ
  • 은이 2020/10/15 09:09 # 답글

    아.. 기뻐하는 관광객을 어떻게 할 수 없던 승무원분이셧군요! ㅋㅋㅋ
    여행하다 보면 이런이 가끔 생기는데.. 참... 좋은 추억.... 여행가고 싶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
  • enat 2020/10/23 22:53 #

    이쁜 곱슬머리만큼 심성도 보드라운 승무원이셨습니다 ㅠㅠ 저도 이번 신제품건만 끝나면 어디론가 날라가버리고 싶은데 갈수가 없네요 ㅠㅠ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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